오동나무 상자를 열다: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명작들

오동나무 상자를 열다: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명작들

[그림 뒤에 숨어 있던 나무 상자의 이야기]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선 조금 생소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국보급 명작들 옆에 어김없이 오동나무 상자가 하나씩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이다. 2026년 10월 7일부터 12월 6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는 그림이나 도자기 자체가 아니라, 유물을 보관해 온 '오동나무 상자'와 그 겉면에 적힌 글씨에 주목하는 전시다.
'상서(箱書)'는 쉽게 말해 유물 상자 겉에 적은 기록이다. 이 작품이 어떤 물건인지, 누구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이 작품을 보고 어떻게 평가했는지가 짧은 글귀로 남아 있다. 간송 전형필 탄신 12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전시는 명작 그 자체를 넘어, 그 작품이 견뎌온 시간과 이력을 복원해 보여준다.



[청년 전형필, 수천억 재산으로 문화재를 사들이다]

이 모든 컬렉션의 시작점에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0년대 조선, 스물네 살의 전형필은 대지주였던 집안으로부터 당시 기와집 수천 채를 살 수 있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한 해 쌀 수확량만 4만 석에 달했던 거부였다. 하지만 그는 그 돈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는 대신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위창 오세창과 간송 전형필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스승이자 스승 같은 선배였던 위창 오세창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오세창은 일본으로 무분별하게 빠져나가는 우리 문화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문화로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문화보국(文化保國)'의 가치를 전형필에게 가르쳤다. 전형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일본인 수집가들과 골동품상들의 손에서 우리 문화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수집은 개인의 취미가 아니라 나라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집 수십 채 값을 던져 지켜낸 유물들]

간송이 문화재를 모으는 과정에는 어마어마한 결단과 돈이 들어갔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는 1935년에 한 일본인 골동품상이 내놓았는데, 이 고려청자를 사기 위해 간송은 2만 원을 지불했다. 당시 서울의 번듯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수준이었으니, 집 20채 값을 도자기 단 한 점에 쏟아부은 셈이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은 한글의 창제 원리가 적힌 유일한 서책이다. 안동에서 발견되었을 때, 책 주인이 요구한 금액은 1,000원. 하지만 간송은 훈민정음의 가치를 그 정도로 매길 수 없다며 1만 원을 치르고, 거간꾼에게 수고비 1,000원을 따로 더 얹어주었다. 6·25 전쟁 피난길에서도 이 책만큼은 품에 안고 다녔다.
출처: 간송미술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혜원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과 <미인도> 역시 간송이 거금을 주고 일본 현지에서 되사온 유산이다. 이 외에도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추사 김정희의 서화 등 조선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이 간송의 손을 거쳐 보존되었다.
출처: 국가유산포털
이번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 전시는 단순히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작품이 수집되고 관리되던 과정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단원 김홍도의 <낭원투도>는 신선 동방삭이 복숭아를 훔쳐 달아나는 장면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림과 함께 그 그림이 담겨 있던 오동나무 상자가 나란히 놓인다. 상자 겉면에는 위창 오세창이 직접 남긴 글씨가 적혀 있어, 당시 지식인들이 이 그림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전시실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30대, 50대, 70대에 걸친 추사의 글씨가 다채롭게 펼쳐지는데, 청년기의 서기 넘치는 필치부터 노년의 거침없는 경지까지 한눈에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성수구>는 추사가 30대 중반(1820년 무렵) 청나라 문인 고순에게 지어 준 행서 대련이다. 파격적인 추사체가 완성되기 전, 중국 법첩을 깊게 익히며 단정하면서도 강하게 치고 나가는 청년 추사의 거침없는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오동나무 상자 위에 남아 있는 위창 오세창의 글씨와 함께 전시되어 내력을 읽는 맛을 더한다.

<차호호공>은 제주도 유배 시절을 전후로 필체에 변화가 생기던 50대의 서화 작업들도 만날 수 있다. 중국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서체를 본격적으로 모색하던 시기로, 형태를 비틀고 획의 굵기를 다채롭게 쓰며 조형미를 실험한 흔적이 역력하다.
출처: 간송미술관
생의 마지막 시기인 70대 글씨에서는 기술이나 기교를 완전히 초월한 모습이 보인다. 붓끝의 기교를 빼고 투박하면서도 자유롭게 써 내려간 글씨는 추사체가 도달한 최후의 완성형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기록이 모여 역사가 되다]

간송 전형필은 자신이 모은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그가 지켜낸 것은 단순한 옛날 그림이나 도자기가 아니다. 식민지 지배라는 암흑기 속에서도 우리가 어떤 문화적 자존감을 지닌 민족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기록들이다.

처: 나무위키
당시 습기 조절과 방충을 위해 오동나무 상자 하나를 만드는 데만 쌀 수십 가마니 값이 들었다고 한다. 간송이 유물 하나하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고 보존하려 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자 겉면에 새겨진 짧은 먹글씨들은 유물이 걸어온 시간을 증언한다. 올가을 성북동 보화각에 들러, 오동나무 상자 위에 새겨진 문장들을 따라가 보길 권한다. 100년 전 한 청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낸 조선의 시간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윤

김지윤

취향이 담긴 물건과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