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 위에서 완성되는 메이크업 파우치의 미학] 인스타그램을 보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비주얼이 있다. 미니멀한 그레이 톤의 패키지, 방금 물에서 갓 나온 듯 투명하게 반짝이는 피부, 그리고 아이폰 뒷면에 착 달라붙어 있는 유니크한 립 케이스. 현재 전 세계 Z세대와 밀레니얼의 메이크업 파우치 지분을 가장 빠르게 집어삼키고 있는 뷰티 브랜드, 로드(rhode)다.
이미지 크레딧: rhode트렌드세터 헤일리 로드 비버(Hailey Rhode Bieber)가 자신의 미들 네임을 따서 2022년 6월 론칭한 로드는 단순한 셀러브리티 뷰티 브랜드의 홍수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평가받는다. 수많은 연예인 브랜드가 화려한 로고와 패키지로 무장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때, 로드는 정반대의 행보를 택했다. 장식을 극도로 덜어낸 무채색의 패키지와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오히려 가장 인스타그래머블 하게 빛나는 비주얼 공식을 완성해 낸 것이다.
브랜드 론칭 이후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드는 여전히 품절 대란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질주 중이다. 단순히 헤일리 비버의 유명세 덕분일까? 그 이면에는 화보의 노이즈 한 톨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비주얼 디렉팅과 1조 원짜리 잭팟을 터트린 영리한 비즈니스 감각이 숨어있다.
[로드를 세상에 각인시킨 신의 한 수, '글레이즈'와 '립 케이스'] 로드가 지금처럼 폭발적인 유명세를 치르게 된 계기에는 헤일리 비버가 유행시킨 독보적인 뷰티 키워드, ‘글레이즈드 도넛 스킨(Glazed Donut Skin)’이 있다. 던킨도너츠 위에 투명하게 코팅된 설탕 시럽처럼, 극강의 수분감으로 번쩍이는 피부 표현을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로 삼은 것이다.
이미지 크레딧: rhode이 개념을 그대로 녹여내어 2022년 브랜드 출범과 동시에 메가 히트 반열에 오른 메인 주인공이 바로 ‘펩타이드 립 트리트먼트(Peptide Lip Treatment)’다. 통통하고 글로시한 입술을 사랑하는 헤일리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출시와 동시에 틱톡의 뷰티 숏폼을 점령했다. 뒤이어 2023년에 선보인 스킨케어 라인의 핵심 ‘글레이징 밀크(Glazing Milk)’는 우윳빛 토너 제형으로 글레이즈드 피부의 바탕을 만들어주며 로드만의 ‘도넛 광’ 마니아층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혔다. 이미지 크레딧: rhode하지만 로드의 브랜딩 능력이 진짜 빛을 발한 순간은 패션을 뷰티에 접목한 굿즈가 등장한 2024년 초였다. 바로 립 트린트먼트를 꽂아서 다닐 수 있도록 실리콘으로 제작된 ‘립 케이스’의 탄생이다. 거울을 보며 셀카를 찍는 인플루언서들의 습성을 정확히 파악한 이 제품은, 아이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 순간 자연스럽게 로드의 립 제품이 노출되도록 디자인되었다. 제품을 파우치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의 일부이자 패션 액세서리로 확장시킨 이 기막힌 마케팅은 전 세계적으로 70만 개 이상 팔려나가며 오직 케이스 판매로만 420억 원이 넘는 기록적인 매출을 올렸다. 화장품을 팔기 위한 ‘미끼 굿즈’가 그 자체로 메가 히트 패션 상품이 되는 비주얼 마케팅의 정수를 보여준 예다.
[완벽함을 지워낸 자리에 들어선 힙, 로파이(Lo-fi) 비주얼 아트] 로드가 보여주는 화보와 비주얼 디자인은 기존 뷰티 브랜드들의 성형외과식 완벽함이나 인위적인 스튜디오 조명과 궤를 달리한다. 로드의 공식 인스타그램 피드를 채우는 사진들은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고, 날것의 느낌이 강하다.
이미지 크레딧: rhode그들의 비주얼 아트는 1990년대의 빈티지한 감성과 현대의 필름 카메라 필터가 섞인 ‘로파이(Lo-fi)’를 지향한다. 햇살이 부서지는 수영장 가에 툭 던져진 제품, 모델의 주근깨와 피붓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클로즈업 샷, 플래시를 터트려 찍은 듯한 거친 그레인효과의 화보들은 소비자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제품을 바르면 나도 헤일리 비버처럼 힙하고 여유로운 캘리포니아의 일상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무드를 판매하는 방식이다. 이미지 크레딧: rhode이러한 비주얼 미학은 2024년 중순 처음으로 선보인 메이크업 라인 ‘포켓 블러시(Pocket Blush)’를 거쳐 최근 라인업으로 확장되면서 더욱 정교해졌다. 새롭게 추가되는 제품들은 마치 장난감 조각이나 모던한 가구 오브제처럼 매끄러운 곡선형 패키지를 자랑한다. 화장대에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인테리어가 되는 훌륭한 시각 디자인 소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색조 라인 역시 인위적인 원색보다는 피부 고유의 톤을 살리는 자연스러운 누드, 로즈, 립 틴트 계열로 구성되어 브랜드가 창립 때부터 추구해 온 ‘내추럴 홈웨어 뷰티’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이어가고 있다.
[비즈니스 우먼 헤일리 비버, 3년 만에 1조 원의 유니콘을 빚어내다] 많은 이들이 로드의 성공을 보며 헤일리 비버를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생각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녀는 경이로운 숫자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천재적인 비즈니스 디렉터다. 로드는 화장품 라인업을 수십 개씩 무분별하게 늘리는 대신 단 10여 개의 핵심 제품에만 집중하는 영리한 압축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연간 순 매출이 2억 1,200만 달러(한화 약 2,900억 원)에 달하는 괴물 같은 브랜드로 성장했다. 론칭 초기 단 11일 만에 1,000만 달러(약 130억 원)의 매출을 올렸던 폭발적인 기세가 일시적인 거품이 아님을 데이터로 증명한 셈이다.
이 무서운 성장세는 결국 자본 시장을 흔들었다. 로드는 미국의 메가 뷰티 기업인 ‘엘프 뷰티(e.l.f. Beauty)’에 무려 10억 달러(한화 약 1조 3,500억~1조 4,000억 원) 규모로 전격 매각되며 창업 3년 만에 기업 가치 1조 원이 넘는 ‘유니콘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대규모 인수합병 이후에도 헤일리 비버는 거액의 엑시트 자금을 확보함과 동시에 브랜드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크리에이티브 총괄(CCO)' 자리를 유지하며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미지: 헤일리 비버 틱톡그녀의 진짜 역량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셀프 브랜딩을 대중의 대량 소비 트렌드로 치환하는 능력에 있다. 본인이 평소 즐겨 입는 미니멀한 패션 스타일, 좋아하는 오버사이즈 재킷, 중성적인 톤앤매너를 로드의 시그니처인 그레이 컬러 패키지에 그대로 투영했다. 핑크와 골드가 판치던 유색 뷰티 시장에서 뚱뚱하고 뭉툭한 무채색의 재생 플라스틱 패키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녀의 미학적 확신과 비즈니스적 뚝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선택이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의 알고리즘을 이해하고 있는 그녀는 화려한 광고판 대신 차 안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5초짜리 숏폼 영상 하나로 수백만 명의 지갑을 열어젖히며 브랜드에 독보적인 진정성을 부여했다.
[유행을 넘어 하나의 ‘비주얼 라이프스타일’이 되다] 로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본질은 단순히 제품의 효능을 과장 광고했기 때문이 아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프레임 안에서 내 파우치와 내 피드를 가장 돋보이게 만들어 줄 ‘시각적 소품’으로서의 가치를 완벽하게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제품을 바르는 행위를 넘어, 제품을 소유하고 사진을 찍어 공유하는 전 과정이 하나의 즐거운 비주얼 놀이가 되도록 설계한 브랜딩은 뷰티 마케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미지 크레딧: rhode화려하게 반짝이는 도넛 광의 립글로스를 바르고, 회색빛의 미니멀한 케이스를 쥔 채 거울 셀카를 찍는 전 세계의 청춘들. 그들은 지금 화장품을 바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헤일리 비버가 설계한 가장 완벽하고 힙한 ‘인스타그램의 한 조각’을 온몸으로 입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