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연적인 재료가 주는 묵직한 울림]
원주의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은 뮤지엄산.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거대하고 정적인 돌의 미학 속에, 최근 가장 뜨겁고도 차분한 검은 에너지가 가득 들어찼다. 전 세계 현대 미술계가 주목하는 ‘숯의 화가’ 이배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의 풍경이다.

만약 현대미술이 난해한 말장난 같다고 느꼈다면, 뮤지엄산의 아치형 입구를 지나 마주하는 이배의 공간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의 전시는 거창한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들이닥치는 거대함만으로 온몸의 감각을 깨우기 때문이다.
이배는 현재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전 세계 하이엔드 컬렉터들을 사로잡은 거장이지만, 그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의외로 친근하다. 세련된 디지털 픽셀과 인공적인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 70대의 작가는 왜 평생 ‘숯’이라는 가장 원시적이고 소박한 재료에 매달려 온 것일까?
[파리의 이방인, 가장 한국적인 ‘덕질’로 길을 찾다]
이배의 예술적 뿌리는 경북 청도, 그리고 그가 서른 중반의 나이에 무작정 떠났던 프랑스 파리의 차가운 바닥에 있다. 1990년, 예술의 본고장에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파리에 도착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돈도 없던 무명 아티스트에게 캔버스와 물감 값은 너무나 큰 사치였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바비큐용 ‘숯’이었다. 물감보다 훨씬 저렴했던 재료. 하지만 이배에게 숯은 단순히 돈이 없어 선택한 대체재가 아니었다. 숯을 한 움큼 쥐는 순간, 그의 유년 시절 고향 청도에서 보았던 기와집의 달집태우기, 할아버지가 먹을 갈아 글을 쓰시던 서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가난한 이방인의 처지에서, 그는 자신만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자 서브컬처인 ‘한국의 정신’을 발견한 것이다.

[시간이 빚어낸 치유와 역설의 미학]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이배가 다루는 재료인 '숯'이 품고 있는 지독한 시간의 미학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압도하며 반기는 대표작 ‘불로부터(Issu du Feu)’는 그 기다림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스케일의 정점이다.

작가가 고향 청도에서 보던 고인돌에서 영감을 얻어 올린 이 거대한 기둥은, 단순한 물질을 넘어 자연의 순환과 치유의 메시지를 건넨다. 특히 이 작품은 지난 2019년 강원도 산불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러한 재앙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혹독한 불길 속에서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지는 대신,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태워내고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덩어리로 압축된 숯. 이배는 이 묵묵한 검은 기둥을 통해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비움과 심연, 그리고 10m 브론즈가 그어 내린 붓질]
전시장은 야외와 실내를 넘나들며 이배가 지닌 숯의 스펙트럼을 더욱 극적으로 펼쳐 보인다. 실내 청조갤러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각적 반전을 선사하는 흰 공간을 만나게 된다.


[묵묵히 걸어온 거장이 전하는 ‘기다림’의 미학]
이배 작가의 작업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일어나 먹을 갈고 붓을 잡는 성실한 장인의 삶을 고수한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수많은 협업 제안이 쏟아지는 지금도, 그의 본질은 파리의 차가운 지하 방에서 숯 한 덩이를 쥐고 행복해하던 서른다섯 청년의 순수함에 머물러 있다.

이배의 검은 세계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비결은 난해한 현대 미술이어서가 아니다. 그 투박한 숯덩이 속에 흐르는 인간적인 온도, 그리고 시련을 견뎌낸 존재가 뿜어내는 진실된 생명력 덕분이다. 뮤지엄산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이배가 던진 검은 선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위로와 함께 다시 일어설 에너지를 얻는다. 유행은 눈 깜짝할 새 변하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구워낸 숯의 온기는 쉽게 식지 않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