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짜리 협업을 하는 ‘오사카 동네 형’, 베르디(VERDY)

수천억짜리 협업을 하는 ‘오사카 동네 형’, 베르디(VERDY)

[스트리트 신의 거물이 된 ‘동네 형’]
잠실 롯데뮤지엄의 거대한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귀여운 판다의 몸에 토끼의 귀를 한 기묘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빅(Vick)’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 세계 패션 신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 ‘걸스 돈 크라이(Girls Don't Cry)’와 ‘웨이스티드 유스(Wasted Youth)’라는 문구가 감각적인 타이포그래피로 벽면을 채우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유스컬처(Youth Culture)의 대명사이자, 나이키, 켄조, 블랙핑크가 앞다투어 러브콜을 보내는 아티스트, 베르디(VERDY)의 개인전 《VERDY: I Believe in Me》의 풍경이다. 동시대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그래픽 아티스트의 전시이기에 언뜻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나 엄숙한 예술병을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프닝 전시장이나 게릴라 팝업스토어에서 실제로 마주한 베르디의 첫인상은 전혀 달랐다.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헐렁한 후드티에 캡모자를 눌러쓴 채 동네 스케이트보드 파크에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친근한 동네 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팬과 경호원 사이에서도 그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동생을 대하듯 환한 미소로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Photo by Takaki Iwata

전 세계가 그가 그린 선 하나, 글자 하나에 열광하며 지갑을 열고 오픈런을 감행한다. 도대체 이 소박하고 친근한 ‘오사카 형’에게 어떤 비밀이 있기에, 콧대 높은 현대 미술계와 글로벌 럭셔리 하우스들까지 그에게 완전히 매료된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화려한 커리어 이면에 숨겨진 ‘덕질’의 역사와 지독할 정도의 진정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펑크 록과 우라하라, ‘덕질’에서 시작된 커리어]

베르디의 예술적 뼈대를 이룬 것은 1990년대 일본 하라주쿠의 뒷골목을 지배했던 ‘우라하라(Ura-Harajuku)’ 문화, 그리고 청춘을 바쳤던 펑크 록과 스케이트보드 문화다. 고등학교 시절 오사카에서 펑크 록 밴드 활동을 했던 그는 사실 음악적 재능보다는 밴드의 로고를 만들고, 포스터를 붙이고, 공연 굿즈(머천다이즈)를 직접 디자인하는 데 훨씬 더 큰 흥미를 느꼈다.그에게 그래픽 디자인은 거창한 아카데미즘이나 직업적 야망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의 유대를 시각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즐거운 놀이’였다. 그는 동료와 함께 디자인 크루 ‘VK 디자인 웍스(VK Design Works)’를 결성하고 인디 음악 신의 앨범 커버를 그리며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기반을 다졌다.

디자인을 전공한 엘리트 예술가들이 레이아웃의 규칙이나 완벽한 비례를 고민할 때, 베르디는 펑크 공연장의 거친 에너지와 땀방울, 그리고 스케이트보드가 노면을 긁고 지나갈 때의 날것 그대로의 감각을 화면에 옮겼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해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 그저 친구들이 내가 만든 티셔츠를 입고 기뻐하는 모습이 좋아서 시작했을 뿐이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이처럼 ‘좋아하는 일을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이 뿜어내는 특유의 건강하고 무해한 에너지는 훗날 그가 거대한 브랜드가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단단한 주춧돌이 되었다.



[가장 사적인 감정으로 전 세계를 위로하다]

베르디 작업의 가장 큰 매력은 거창하고 난해한 철학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자신이 삶에서 느끼는 아주 사적인 감정과 경험을 직관적인 타이포그래피로 번역하여 대중에게 던진다. 그의 시그니처 브랜드들이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출처: 롯데뮤지엄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를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브랜드 ‘Girls Don't Cry (걸스 돈 크라이)’이다. 전 세계 패션 마니아들이 이 로고가 박힌 옷을 사기 위해 밤새 줄을 서지만, 정작 이 브랜드의 탄생 배경은 지극히 사소하고 다정하다. 어느 날 베르디의 아내가 심적으로 크게 지치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고, 베르디는 오직 자신의 아내를 위로하고 다시 웃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영국 밴드 큐어(The Cure)의 곡 제목에서 영감을 얻어 티셔츠를 제작했다. “지치고 힘들어도 울지 마, 내가 곁에 있잖아”라는 지극히 사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담긴 옷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이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SNS를 통해 퍼지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 청춘들이 그 다정한 위로의 문구에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낸 극적인 순간이었다.또 다른 축을 이루는 브랜드 ‘Wasted Youth’ 역시 베르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다. 직역하면 ‘쓸모없이 보낸 청춘’이라는 뜻이지만, 그 이면에는 반전의 긍정이 숨어있다. 베르디 역시 커리어 초기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방황하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위의 성공한 이들을 보며 자책하던 어느 날, 그는 “내가 허송세월한 것 같았던 그 방황의 시간조차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며,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버드와이저 맥주 캔(방황의 상징)에서 아름다운 튤립꽃이 피어나는 그의 대표적인 그래픽은 바로 이러한 청춘의 연대를 의미한다.


여기에 그의 또 다른 자아이자 페르소나인 캐릭터 ‘빅(Vick)’이 더해진다. 판다와 토끼가 섞인 이 귀여운 캐릭터는 마냥 이쁘장하기만 한 인형이 아니다. 빅은 펑크 음악을 좋아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때로는 세상에 장난스러운 반항을 던지는 힙한 영혼을 가졌다. 베르디는 빅이라는 귀여운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복합적인 감정과 유스컬처의 반항성을 위트 있게 표현해내고 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협업의 아이콘']

베르디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협업’이다. 오늘날 수많은 아티스트가 협업을 진행하지만, 베르디만큼 장르의 경계를 종횡무진하며 상대 브랜드의 가치를 폭발시키는 아티스트는 드물다. 그의 그래픽이 얹어지는 순간, 어떤 딱딱하고 거대한 브랜드도 순식간에 ‘가장 트렌디한 길거리의 문화’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인 사례는 단연 블랙핑크와의 협업이다. 베르디는 블랙핑크의 월드투어 《BORN PINK》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어, 투어 굿즈와 캡슐 컬렉션의 비주얼을 총괄했다. 그 특유의 펑크한 타이포그래피로 재해석된 블랙핑크 로고와 핑크색 옷을 입은 캐릭터 ‘빅’은 전 세계 팝업스토어마다 끝없는 대기 줄을 만들어내며 K-POP 비즈니스의 시각적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를 받았다.
스트리트웨어 신에서의 전설적인 협업으로는 나이키 SB와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 나이키의 스케이트보드 라인과 손잡고 출시한 빨간색 ‘Girls Don't Cry’ 덩크 로우 스니커즈는 베르디의 고향인 오사카에서만 극소량 한정 발매되어 스니커즈 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현재까지도 리셀 시장에서 엄청난 프리미엄을 자랑하는 아이템이다.

출처: Humanmade

또한 스트리트 패션의 살아있는 거장 니고(NIGO)의 브랜드 ‘휴먼 메이드(Human Made)’와는 형제 브랜드라 불릴 정도로 끈끈한 협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니고가 럭셔리 하우스 켄조(KENZO)의 디자이너로 부임하자마자 베르디를 초청해 켄조의 아이덴티티를 젊고 신선하게 전면 재해석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베르디의 태도다. 그는 어떤 거대한 글로벌 기업이나 럭셔리 하우스와 일할 때도 결코 주눅 들거나 상대의 스타일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파트너들을 자신의 ‘소박하고 펑크한 놀이터’로 끌고 들어와 함께 즐겁게 노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기에 그의 협업은 상업적인 냄새보다, 친구들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벌이는 듯한 순수한 즐거움이 먼저 느껴진다.



[다큐 속 소박한 작업실, 그리고 《I Believe in Me》]

전시에 베르디의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수천억 원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거장의 작업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엄숙한 미술가의 아틀리에라기보다는, 차라리 ‘성공한 덕후의 방’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출처: visla.kr

그의 책상과 벽면은 세계를 돌며 수집한 온갖 희귀 피규어, 좋아하는 인디 밴드들의 스티커, 스케이트보드 데크, 그리고 친구들이 무심히 던져주고 간 선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세련된 최첨단 디지털 장비나 거대한 캔버스 앞이 아니라, 바로 그 ‘덕후의 책상’에 앉아 소년 같은 표정으로 낙서를 하듯 펜을 굴린다. 그는 예술을 ‘업무’나 ‘과시’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탐닉하는 ‘순수한 놀이’로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출처: 롯데뮤지엄

이번 롯데뮤지엄 전시의 타이틀인 《I Believe in Me (나를 믿는다)》는 그래서 더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 문장은 타인의 기준이나 세상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기 안의 순수한 감각을 믿고 걸어온 한 덕후의 당당한 선언이다. 미술계의 정식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았어도, 거창한 철학적 포장을 두르지 않았어도, 오직 자신의 진정성 하나로 세상의 중심에 선 형이 뒤따라오는 청춘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응원이기도 하다.


김지윤

김지윤

취향이 담긴 물건과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