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인간의 밑바닥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로 유명한 도박 만화입니다. 도박꾼 카이지는 주인공답지 않은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요.
자신이 세운 계획이 어그러지자 상대편에게 눈물을 흘리며, ‘무승부로 하자’며 울면서 빌기도 합니다. 당황스러운 모습이지만, 누구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앞에 이런 소심한 모습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면이 공감이 가죠.
하지만, 그가 감정에 짓눌리면서도 계속하는 게 있는데요. 기획(企劃)입니다. 기획은 까치발을 들고(企), 미래를 계획(劃)하는 걸 의미합니다.
카이지는 동료인 사카자키 아재와 함께 불법 슬롯머신인 늪을 공략하는데요. 이 과정 속에 있는 기획 원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욕망 & 목표 설정
기획 첫걸음은 욕구를 명확히 인지하고 대략으로라도 목표를 세우는 겁니다. 기획을 하는 이유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표가 있어야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 대략이라도 감이 생기죠.
카이지는 빚을 갚아 지하 강제 노역 시설에 벗어나고, 사카자키 아재는 돈을 벌어 단란했던 가정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이 둘은 ‘늪’이라는 불법 슬롯머신을 공략해 6억 엔을 버는 걸 목표로 대략 정했습니다.

목표를 세운 다음 할 일은 정보 수집입니다. 정보를 모아야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정보는 어떻게 빠르게 모을 수 있을까요?
정보를 빠르게 모으는 방법은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카자키 아재는 ‘승자가 생길 경우, 상금은 얼마나 갖지?’, ‘승자가 생겨 구슬이 모두 사라지면, 아무도 안 할 텐데 누가 메우지?’ 같은 질문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정보 수집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이제 목표를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사카자키 아재는 모은 정보들로 카지노 측에서 손해를 보면서까지, 기계를 들여놓을 리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또,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카지노 측에서 돈을 회수하기 위해, 결과를 조작해 당첨자를 가려내지 않았을까?’ 판단했죠.
물론, 당첨자는 내부자일 거라 추측했습니다. 카이지가 당첨자를 확인하니, 정말 카이지가 이미 아는 내부자였죠.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문제를 정의하는 겁니다. 미국 경영컨설팅업체 맥킨지는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큰 문제를 우선 작은 문제로 나누어 해결하라고 제안하며 이 방법을 MECE(Mutually exclusive and collectively exhaustive)라고 불렀습니다.
이 방법론은 큰 문제를 작은 문제로 중복되지 않게 나눕니다. 이때, 필요한 정보가 빠지지 않았나 잘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문제더라도, 작은 문제로 나누면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죠.
‘늪’은 가게 측에서 조작한 슬롯머신이기에, 아직까지 누구도 해결 못 한 큰 문제입니다. 아재는 정보를 수집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총 3가지 작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아냅니다.

두 번째는 ‘문지기’입니다. 못의 숲을 통과한 구슬을 2차적으로 막는 레버가 있습니다. 아재는 3개 중 하나 확률로 구슬이 들어간다는 걸 알고, 따로 대책을 세우진 않았습니다. 다만, 확률을 계산해 돈을 준비하죠.
마지막 최종 관문은 ‘3단 원반’인데요. 문제는 3단 원반 마지막 최종 당첨구에는 ‘구슬이 절대 안 들어가도록’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카지노측은 구슬의 컨트롤, 원반 낙하 속도, 돌입 각도를 계산해 완벽에 가깝게 방어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상태였죠.
하지만, 아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당첨구에 구슬을 넣기 위해, 맥주캔에 자석을 안 보이게 넣어 움직임을 일그러뜨리기로 합니다.
그가 고안한 해결책을 정리하자면, 확률을 계산해 충분한 군자금을 마련. 그리고, 못 설정이 느슨한 날에 자석 캔을 활용해 3단 원반 최종 당첨구에 구슬을 넣는 기획을 짰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검증뿐이었죠.

5. 검증
마침내 검증 날. 계획대로 3단 원반까지 구슬이 잘 갔죠. 하지만, 이 기획은 실패합니다. 아재 편인 줄 알았던 관계자가 거짓 정보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자석이 통하지 않는 구슬로 교체한 터라 준비했던 자석도 통하지 않았죠.
이렇게 1차 검증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재와 카이지의 반응은 갈렸는데요. 아재는 5천만 엔에 가까운 돈을 잃고 이성을 잃습니다. 그는 2차 기획을 세우긴 하지만, 운에 맡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경마장에서 돈을 딴 후, 늪에 재도전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세웠죠.
다행히 카이지는 운에 맡기지 않습니다. 앞서 세웠던 3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모두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기획을 전면 뜯어고칩니다. 그리고 추가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죠.

다음 날, 카이지는 늪 앞에 앉아 밤새도록 슬롯머신을 관찰합니다. 그러다 아침에 카지노 점장과 마주치는데요. 점장은 카이지에게 ‘당분간 못을 조정해 구슬 통과 확률이 낮아질 테니,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며 그를 비웃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죽을만한 상황인데요. 문제가 더 어려워졌지만, 카이지는 점장 말에서 오히려 첫 번째 문제인 ‘못의 숲’ 공략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 정보를 수집했죠. 카이지는 꾀를 내어 구슬을 환금해달라며 점장을 다시 찾아갑니다. 점장실에서 너스레를 떨며 기획에 도움이 될만한 추가 단서를 모으죠.
카이지는 이전 실패에서 나머지 문제를 해결할 만한 단서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만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상세히 설명 않겠지만. 이전 실패에서 단서를 잡아, 이전보다 훨씬 더 탄탄해진 기획을 갖고 되돌아옵니다.

만화긴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문제 해결 방식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논리학자 찰스 퍼스는 문제 해결에 기본적인 논증법은 3가지가 있다고 말했는데요. 그 3가지는 연역법, 귀납법, 가추법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방법은 가설을 세워 추론하는 논증 방법인 가추법에 해당합니다. 가추법은 결국 추론이란 점에서, 연역법과 귀납법보다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연역법과 귀납법은 이미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를 펼치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얻어낼 가능성이 없습니다. 반면, 가추법은 추론을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죠. 그 결과가 성공이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정보를 얻습니다.
가설이 실패하면 자연히 내가 잃은 손실에 눈이 더 갑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성을 잃곤 하죠. 사카자키 아재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경마장에 갔듯이요.
하지만, 카이지처럼 가설이 실패해도, 오히려 새로운 앎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가추와 관련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99번은 틀리고 100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맞는 답을 얻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