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근교의 항구 도시 요코하마는 1859년 개항 이후 외래문화의 관문 역할을 해 왔다. 문호 개방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요코하마의 식탁은 일본과 중국, 서구의 맛이 뒤섞인 독특한 형태로 진화했다. 이곳의 면 요리에는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며 만들어낸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코하마 소울푸드 ‘교쿠센테이’ 산마멘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근대 개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개항 이후 유럽 상인들은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중국인 통역관과 함께 요코하마를 찾았다. 이를 계기로 요코하마 내에 중국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날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500여 개의 점포가 밀집돼 있다. ‘일본 최대의 차이나타운’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딤섬과 북경 오리, 월병과 각종 차에 이르기까지 ‘중국’ 하면 떠오르는 먹거리와 볼거리들이 관광객을 기다린다.
요코하마의 관광 스팟 차이나타운.요코하마를 대표하는 음식 ‘산마멘’ 역시 중국 요리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신선하다’를 뜻하는 광둥어 ‘산’, ‘재료를 올리다’라는 의미의 ‘마’를 써 ‘신선한 재료를 듬뿍 올리다’라는 뜻을 지닌 산마멘은 간장 라멘 베이스에 채소와 걸쭉한 전분물을 얹어 내는 요리다.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근무하던 종업원들의 식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데, 요코하마항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위해 제공되던 메뉴라는 설도 있다. 현재는 가나가와현 전역에서 맛볼 수 있는 이 지역의 소울 푸드로 자리 잡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산마멘 맛집으로는 1918년 문을 연 노포 ‘교쿠센테이’가 있다. 화려한 고급 식당이라기보다는 언제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는 수수한 가게다. 이곳에서 난생처음 본 산마멘은 내가 알던 라멘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전분 소스를 끼얹은 모양이 한국의 울면과 비슷하지만 국물 색깔이 다르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간장 라멘을 베이스로 한다기에 평범한 일본 라멘처럼 국물이 무겁고 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맛이 엷은 간장 라멘에 식감을 살려 볶은 채소를 곁들인 느낌이다. 걸쭉한 국물과 가느다란 면의 궁합도 생소하지만 재미있다. 현지인처럼 즐기고 싶다면 산마 완탕멘이나 볶음밥 하프 사이즈를 주문해 보자.
산마멘을 판매하는 오래된 중화요리 전문점 ‘교쿠센테이’. 5 Chome-127 Isezakichō, Naka Ward, Yokohama, Kanagawa 231-0045 일본
아는 맛이라 더 맛있다 ‘잇핀코’ 탄멘 요코하마 중화요리 중 산마멘보다 한국인에게 좀 더 친숙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탄멘이다. 맑은 육수에 볶은 채소를 수북이 얹은 모습이 나가사키 짬뽕을 연상시키기 때문. 탄멘은 전후 일본에 정착한 만주 출신 사람들로부터 유래되었고, 시간이 흘러 오늘날 요코하마 중화요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탄멘이 맛있는 요코하마의 ‘잇핀코’. 일본 〒220-0005 Kanagawa, Yokohama, Nishi Ward, Minamisaiwai, 1 Chome−5 相鉄ジョイナス B2階현재 가나가와 현의 여러 중화 요릿집에서 탄멘을 판매하고 있지만, 원조로 꼽히는 곳은 따로 있다. 1955년 창업 이후 요코하마에 여러 곳의 점포를 보유하고 있는 ‘잇핀코’다. 원조라는 명성에 걸맞게 탄멘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한데, ‘탄멘 월드 요코하마 잇핀코’라는 이름으로 점포를 오픈할 정도다. 된장 탄멘, 간장 탄멘, 새우 토마토 탄멘까지 여러 종류의 탄멘을 취급하고 있지만, 역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시그니처인 ‘절품 탄멘’이다.잇핀코의 탄멘.앞서 탄멘의 생김새가 나가사키 짬뽕과 닮았다고 썼는데, 맛도 비슷한 편이다. 실제로 현지 인터넷 커뮤니티에 두 요리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나 비교 글이 종종 올라올 정도다. 채소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탄멘으로, 해산물을 포함해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을 짬뽕으로 분류하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어쨌든 확실한 것은 두 요리의 맛이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다. 닭을 베이스로 한 탄멘의 육수는 기름지고 짭짤한 풍미를 지녔다. 작게 자른 배추를 중심으로 목이버섯 등 각종 채소를 볶아 고소한 맛과 단맛을 더했고, 후추의 매운맛이 뒤를 받친다. 특히 배추의 달큰한 맛이 짠 국물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채소를 추가해 먹을 수 있는 옵션을 뒤늦게 발견한 점이 못내 아쉬울 정도로 배추의 역할이 크다. 산마멘처럼 독특하거나 생소한 요리는 아니지만, 요코하마 시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든 맛이 궁금하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코스다.
어른의 급식 스파게티 ‘센터 그릴’ 나폴리탄 중식보다 양식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나폴리탄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폴리탄은 <심야식당>, <고독한 미식가> 등 일본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로, 식당은 물론 다방에서도 판매하는 스파게티다. 나폴리탄이 재미있는 이유는 나폴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데다 토마토소스가 아닌 케첩을 활용한 스파게티이기 때문이다.
요코하마의 오래된 양식당 ‘센터 그릴’.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판매한다. 1 Chome-9 Hanasakicho, Naka Ward, Yokohama, Kanagawa 231-0063 일본그렇다면 나폴리탄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나폴리탄의 탄생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후 요코하마의 ‘뉴 그랜드 호텔’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식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이곳의 총주방장이 토마토소스에 여러 재료를 추가하여 만든 스파게티가 나폴리탄의 시초라고 한다. 이후 요코하마의 양식당 ‘센터 그릴’에서 생토마토에 비해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케첩 베이스의 레시피를 개발했고, 이것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일본식 서양 요리의 대표 메뉴로 자리 잡게 되었다.센터 그릴의 나폴리탄.센터 그릴의 나폴리탄은 가게 이름이 새겨진 타원형 스테인리스 접시에 담겨 나온다. 세련되고 도시적이라기보다는, 투박하지만 정겹다는 표현이 알맞다. 면발부터가 그렇다. 일반적인 스파게티보다 두꺼운 면발을 부드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푹 삶았다. 토핑으로 올라간 버섯과 피망은 급식 시간에 나왔던 스파게티와 똑 닮았다. 하지만 소스만큼은 급식 스파게티의 그것보다 좀 더 강렬하다. 케첩을 사용해 달큰하고, 새콤하고, 짭조름한 소스가 볶음면처럼 면발에 착 달라붙어 입맛을 돋운다. 사이드 메뉴로 굴 튀김이나 멘치카츠 등을 추가하고, 치즈와 타바스코로 변주를 주면 급식 스파게티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기가 막힌 맥주 안주의 느낌을 풍긴다. 한 번 빠져들면, 이탈리아 정통 토마토 파스타보다 이쪽이 더 자주 떠오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