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스시에 담긴 수백 년 역사
19세기 초, 일본 식문화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 있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니기리즈시’ 발명이다. 에도마에즈시라고도 불리는 니기리즈시는, 에도시대(1603-1868년) 후기 ‘하나야 요헤이(華屋與兵衛)’가 손으로 쥐어 만든 스메시* 위에 에도 앞 바다에서 나는 신선한 어패류를 얹으며 시작됐다.
니기리즈시의 본래 목적은 빨리 만들어 많이 팔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아이디어가 뜻하지 않게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일본 스시 역사를 통째로 뒤바꿔 놓았다. 신선한 해산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길거리 음식이었던 스시가 정교한 장인의 음식으로 변모했을 뿐 아니라, 도쿄 전역의 니기리즈시 일변도를 가져왔고, 에도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200년 전통의 ‘스시야 계보’까지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일본을 넘어 세계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서 스시 열풍이 불고 있다. 미쉐린 가이드,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W50BR), 라 리스트(La Liste) 등 국제적인 미식 평가 기관에서도 변함없이 스시에 주목한다. 무엇이 스시를 세계 미식 시장의 최전선에 우뚝 세운 걸까. 그저 오랜 역사와 전통 때문일까.
그 중심에는 단연 ‘스시 쇼쿠닌*’이라 불리는 스타 셰프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기술과 철학을 배우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스시 유학길에 오르는 수많은 열정 셰프가 있다. 오늘 소개할 ‘하시라’의 윤주환 셰프 또한 그 열정 셰프들 중 한 명이다.
* 스메시(酢飯, すめし) : 스(酢, 식초) + 메시(飯, 밥) = 식초로 간한 밥. 요즘은 스메시의 은어로 ‘샤리’가 널리 쓰인다.
* 쇼쿠닌(職人, しょくにん) : 장인.
혜성처럼 등장하다

2023년 12월, 청담동에 한 셰프가 등장했다. 윤주환.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예약이 어려운 스시야로 손꼽히는 ‘하시라’의 오너 셰프다.
미즈시(1855년 오픈)와 규베이(1935년 오픈)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이어온 에도마에즈시 명가 ‘카네사카(2000년 오픈)’에서 7년 동안 수련했으니 해외파 셰프 중에서도 경력이 많은 편이지만, 이 경력만으로는 윤주환 셰프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는 감각적이다. 타고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요리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여기에 성실함과 민첩함, 파고드는 집중력, 수준 높은 기술까지 더해졌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하시라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오롯이 셰프로부터 나온다.
[츠마미 – 오감을 깨우는 첫 장]
늘 새롭다. 갈 때마다 매번 독창적인 변주를 더한 츠마미를 만났을 정도로, 변화 속도가 빠른 편이다. 동시에 감각적이다. 전통과 혁신 사이를 넘나들며 과감한 식재료 조합을 시도하는데도, 흔들림 없이 날렵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하시라의 츠마미는 입맛을 돋우는 술안주일 뿐 아니라, 오감을 깨우는 시작이다.
1. 스이모노 (吸物, すいもの) / 맑은 국

모시조개로 만든 스이모노. 맑은 국물을 머금으니 감미로운 바다의 풍미가 따뜻하게 스며들고, 제철 생미역을 폰즈에 살짝 적셔 음미하니 탱글한 식감과 짭짤한 고소함, 상큼한 감칠맛이 입맛을 깨운다. 이어질 다음 요리를 기대하게 만드는, 싱그러운 봄 바다를 담은 한 그릇.
2. 오사시미 (お刺身, おさしみ)

쫀쫀하고 담백한 광어 속살과 단단하고 기름진 지느러미살, 크리미한 안키모 소스와 아삭한 파. 단순해 보이지만 겹겹이 쌓아놓은 식감 층위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광어에 와사비를 살짝 올려, 파를 섞은 안키모 소스에 찍어 먹으면 농후한 감칠맛과 산미, 향긋한 알싸함이 진하게 어우러지며 본격적으로 입맛을 돋운다.
3. 미루가이 (海松貝, みるがい) / 왕우럭조개

집는 순간부터 미루가이의 탄력이 젓가락을 통해 전해진다. 한입 베어 무니 아삭, 사각, 오독! 씹을수록 달큰하고 고소한 단맛이 우러나오고, 여기에 나마시치미*까지 살짝 얹으면 온갖 종류의 향이 경쾌하게 톡톡 터진다. 직관적이고 강렬하다. 술을 술술 부르는 맛.
* 나마시치미 (生七味, なましちみ) : 생으로 간 고추, 유자 껍질, 산초, 깨, 생강, 파래 등을 섞어 만든 향신료. 일반적인 건조 시치미(七味唐辛子)와 달리, 수분이 살아 있어 풍미가 강하고 신선하다.
4. 차완무시 (茶碗蒸し, ちゃわんむし) / 일본식 달걀찜

찰랑찰랑 보드라운 차완무시. 3~6월 사이에 물이 오르는 금태의 기름진 단맛과 김의 감칠맛이 녹아들어, 첫입부터 깊고 그윽하다. 한 템포 쉬어가듯 입맛을 정리해 주면서도, 동시에 은은한 여운을 남긴다.
5. 무시아와비 (蒸鮑, むしあわび) / 찐 전복

먼저 자연산 찐 전복부터. 인위적인 단맛 없이 진하게 농축된 자연의 풍미가 가득하고, 촉촉한 식감이 편안하며 나긋나긋하다. 하지만 그다음은 다르다. 쫀득한 무늬오징어, 쫄깃한 전복 자투리, 침샘을 자극하는 짜릿한 샤리, 녹진한 전복 내장 소스를 한데 비벼 입에 넣는 순간, 화려한 식감과 통통 튀는 균형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하시라의 시그니처 중 하나라 여러 번 먹어봤는데도 매번 놀랍다. 이 작은 그릇 안에 조밀하게 짜 넣은 다양한 레이어가.
6. 니타코 (煮蛸, にだこ) / 조린 문어, 삶은 문어

제목은 니타코지만, 타코와 무가 주인공 자리를 두고 겨루는 요리. 타코는 적당한 탄력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달큰한 소스로 제 몫을 다한다. 그런데 의외로 평범해 보이는 무 한 조각이 발군이다. 투명할 정도로 얇디얇은 튀김옷을 파사삭 깨물면, 촉촉한 무 속살이 뭉그러지며 맑고 깊은 단맛과 고소한 감칠맛을 뿜어낸다. 어찌나 깔끔한지. 잡내도, 잡맛도 전혀 없다.
윤주환 셰프의 정교한 기술과 집념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무를 처음부터 소스에 졸이면 불필요한 성분까지 스며들기 때문에, 먼저 쌀겨물에 데쳐 보호막을 만든 후 소스에 졸이고 전분을 입혀 튀겨낸다고. 이 한 끗 차이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7. 즈와이가니 (ズワイガニ, ずわいがに) / 대게

대게살의 바다 내음에 앙가케*의 걸쭉한 온기가 더해진, 잔잔한 휴식 같은 수프. 곁들인 토란 튀김의 땅 내음과 끈적한 바삭함은 대게 수프와 대비를 이루고, 살포시 얹은 대게 내장과 청귤은 잔재미를 더한다. 점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숟가락 대신 젓가락으로 면처럼 집어 먹는 것도 괜찮다.
* 앙가케(葛餡, あんかけ) : 녹말 등으로 걸쭉하게 만든 소스를 끼얹은 요리.
8. 타치우오야끼 (タチウオ焼き, たちうおやき) / 갈치구이

갈치 겉면에 도미 내장 소스를 섬세하게 발라 정교하게 구워낸 타치우오야끼. 반짝반짝 눈부신 껍질의 파삭함과 담백한 속살의 포슬포슬함, 도미 내장 소스의 압도적인 감칠맛이 혀에 감긴다.
9. 모즈쿠 (藻塊, もずく) / 큰실말

새콤한 모즈쿠 위에 두 번 튀겨낸 아나고 강정. 니기리즈시 시작 전 입가심 용도로 먹는 클렌저일 뿐인데도, 여기에서조차 잔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새콤한 청량감과 고소한 기름기, 시원함과 따뜻함, 미끄러움과 바삭함이 유쾌하게 충돌한다.
츠마미의 운율과 흐름
1번에서 담백한 여운을 남기며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고, 2번에서 스윽 끌어올렸다가, 3번에서 강렬하게 훅 치고 들어오더니, 4번에서 잠시 쉬고, 5번에서 다시 통통통 치고 들어오더니, 6번에서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혹시 피곤해? 하며 7번에서 따뜻하게 품어주다가, 8번에서 진하게 휘몰아치고는, 9번에서 유쾌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하나하나의 요리가 훌륭할 뿐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한 듯 리드미컬하게 끌고 가는 흐름 또한 특별하다.
[스시부터 디저트까지 – 흐름의 미학]
하시라의 스시는 안정적이다. 에도마에즈시의 전통을 존중하며 기본에 충실하고, 기복이 없다.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균형과 완급 조절, 흐름에서 하시라만의 특별한 감각이 드러난다.
10. 시마아지 (縞鯵, しまあじ) / 줄무늬전갱이, 흑점줄전갱이

11. 이사키 (伊佐木, いさき) / 벤자리

12. 스미이카 (スミイカ, すみいか) / 갑오징어

12-1. 갑오징어 다리 구이

13. 아카미 (赤身, あかみ) / 참다랑어 속살

14. 오오토로 (大トロ, おおとろ) / 참다랑어 대뱃살

15. 코하다 (小鰭, こはだ) / 전어

16. 우니군칸마키 (雲丹軍艦巻き, うにぐんかんまき) / 성게소군함말이

17. 안키모(鮟肝, あんきも) / 아귀간

18. 아나고큐리마끼 (穴子胡瓜巻き, あなごきゅうりまき)/ 붕장어오이김밥

19. 간뾰마끼 (干瓢巻き, かんぴょうまき) / 박고지김밥
20. 훈연참치마끼 (燻製鮪巻き, くんせいまぐろまき)

21. 오완 (御椀, おわん) – 네기마지루

22. 타마고야끼 (卵焼き, たまごやき)/ 달걀구이, 교꾸

23. 칸미 (甘味, かんみ) – 천혜향 양갱

스시 코스의 시작은 시마아지. 기름진 감칠맛이 탱글한 샤리의 산미와 어우러져 침샘을 자극한다. 입맛을 빠르게 끌어올리는 시작이다. 두 번째는 껍질만 살짝 아부리한 벤자리돔. 고소한 풍미를 응축시키면서도 자극적인 불향은 남기지 않는 섬세한 조율로, 입안을 강하고 부드럽게 휘감는다. 그다음은 스미이카. 녹진한 식감과 은은한 단맛으로 고조되던 흐름을 잠시 낮추며 숨을 고른다. 그러다 ‘이제 슬슬 정점으로 진입하려나’ 싶을 때, 갑자기 자그마한 꼬치에 끼운 오징어 다리 구이가 귀엽게 등장한다. 안정적인 흐름 중간에 잔재미 하나를 쓰윽 밀어 넣는 감각. 하시라답다.
스시 코스의 정점은 참다랑어와 전어. 먼저 아카미와 오오토로가 연달아 등장하며 참다랑어의 양극단을 밀어붙인다. 화려한 산미와 감칠맛으로 긴장감을 주는 아카미와, 촘촘한 지방과 진한 고소함으로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오오토로가 서로 대비를 이루며 클라이맥스까지 끌고 올라가다가, 최고조에서 강렬한 전어가 등장하는 흐름. 하시라의 전어는 숙성을 길게 하지 않아서, 과한 발효 향이 없으면서도 풍미가 관능적이다.
후반부는 완급 조절이 핵심이다. 단새우와 우니의 가벼운 부드러움으로 잠시 무게를 덜어냈다가, 프와그라를 연상케 하는 안키모로 다시 묵직함을 더한 후, 아나고큐리마끼, 훈연참치마끼, 간뾰마끼로 산뜻하고 깔끔하게 입맛을 환기시킨다. 마지막으로 맑고 따뜻한 네기마지루*로 식사의 잔여감을 말끔히 정리한 다음, 달콤한 타마고야끼와 상콤한 천혜향 양갱으로 마무리한다. 과시보다 균형을 택한 구성이다.
* 네기마지루(葱鮪汁, ねぎまじる) : 네기(葱, 파)+마구로(鮪, 참다랑어)+지루(汁, 국물). 파와 참다랑어로 만든 국물 요리.
“하시라답다”

15개월 동안 총 다섯 번의 경험. 늘 새로웠지만, 늘 편안했다. 빠른 변화와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한 번에 담아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진데, 하시라에서는 항상 두 축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코스의 흐름을 밀고 당긴다.
그 중심에는 역시 윤주환 셰프가 있다. 수많은 코스를 거듭하며 날카로워지는 손끝,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감각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빠르게 구축해 나가며, 하시라를 더욱 하시라답게 만든다.
윤주환 셰프의 하시라는, 지금도 계속 성장 중이다.
스시를 즐기는 마음
이런저런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마음 편히 먹고 마시는 시간도 좋다. 하지만 가끔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맛과 향뿐 아니라 코스 전반의 리드미컬한 흐름에도 집중해 보자.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따라가다 보면, ‘미식’이 단지 좋은 음식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 다듬고 발전해 온 공감각적인 예술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