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NS를 보면 지브리 스타일로 변환된 가족사진, 연인 셀카가 참 많이 보인다. 애니메이션화된 이미지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AI 이미지 생성 기술의 발전은 이제 누구나 ‘감성적이고 예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걸 단순히 기술의 진보로만 바라봐도 괜찮을까.

지브리 스타일은 따뜻한 색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인물, 풍성한 풍경 표현 등으로 특유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위 이미지만 보아도 행복하고 따뜻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렇게 AI가 제공하는 감성은 실제 인물이나 관계에 내재된 감정이라기보다, 예측 가능한 포맷의 감정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지브리 스타일로 변환된 이미지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진짜보다 예쁘게, 복잡한 감정은 단일 감정으로 단순화된다. 그렇게 실제 감정은 재현되지 않고 편집되어 버린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감정마저 디자인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게 되는가: 이미지가 사실을 덮는 순간]
사진은 원래 사실을 기록하는 도구였다. AI 이미지가 사진을 대체하게 되는 순간, 기억은 사실에서 점점 멀어진다. 최근 히틀러를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변환한 AI 이미지가 온라인에 공유되며 논란이 일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유행에 편승해 백악관 공식 X 계정에서, 미국 이민국 직원이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여성을 체포해 그녀가 울고 있는 장면을 지브리 스타일로 바꾸어 게시했다. 이에 이민자 탄압을 미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모든 것을 변환할 수 있다는 것은 혐오와 폭력성까지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이런 이미지들의 재생산으로 인해 실제 역사적 맥락과 괴리되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귀여움’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건 밈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의 재구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지금 동일한 요청을 하면 GPT가 요청을 거절하고 있지만, 일차원적인 제한만으로는 무심코 만들어질 왜곡까지 막을 수는 없다. 하이브 기자회견에서의 민희진을 지브리 풍으로 그리는 것까지 openAI 측에서 예측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는 저작권뿐만 아니라 초상권 문제로도 이어진다.

일상에 침투한 이미지를 보자. 가족과 찍은 사진을 AI 스타일로 바꾸는 것 – 결혼사진, 생일파티, 첫돌 사진 모두가 이상화된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남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진짜로 기억하게 될까. 주름진 손, 흐트러진 머리, 그날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환상처럼 정제된 이미지만 남는다. 이는 단순한 ‘꾸미기’가 아니다. AI는 점점 기억의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이 바뀌면, 관계도, 감정도, 정체성도 재편될 수 있다.
한편, AI는 단지 과거를 미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을 생성해 낼 수도 있다. “가상의 애인과 함께한 지브리 풍 여행 사진”, “존재하지 않는 친구와 함께 찍은 생일 파티 이미지” 같은 콘텐츠가 생겨난다. 기술은 추억을 편집할 뿐 아니라, 아예 새로 창작까지 해버리고 있다.
[스타일,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헤게모니]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왜 하필 ‘지브리 스타일’인가. 지브리 스타일은 단순한 애니메이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감성, 위로, 향수, 자연, 평화, 잔잔함과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위에서 언급한 ‘무해한’ 이미지라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사람들은 지브리 스타일을 통해 ‘이건 좋은 이미지야’라는 정서적 신뢰를 자동으로 부여받는다.
지브리는 특유의 인간적인 손맛이 있고 감정을 담은 디테일이 있다 보니 AI가 그 스타일을 차용했을 때 ‘기계가 만든 감성적인 이미지’라는 낯설고도 매력적인 느낌까지 준다.

이건 일종의 문화적 헤게모니이기도 하다. 헤게모니는 단순한 강제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상성’이다. 그동안 거대 브랜드들이 만들어온 것은 단순히 스타일을 넘어, ‘이야기란 무엇인가’, ‘감동이란 어떤 감정인가’, ‘귀여움은 어떤 이미지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어왔다. 지금 우리는 AI 시대의 미적 헤게모니를 목격하고 있다. 지브리 스타일, 디즈니 스타일 등 몇 가지 거대 브랜드의 시각 언어가 전 세계 사용자들에게 ‘이렇게 그려야 예쁘다’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헤게모니는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택의 폭을 제한한다. 수많은 스타일이 존재하지만,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유독 ‘지브리 스타일’, ‘디즈니 풍’을 추천하고, 사용자도 그에 맞춰 창작한다. 개인의 미적 감각은 대기업의 브랜드 전략 안에서 길들여지는 셈이다.
디즈니와 같은 거대 브랜드는 지금처럼 자신들의 스타일이 무단으로 반복 재생산되는 것에 왜 법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까? 그들이 소송을 포기했다기보다는 전략적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디즈니는 실제로 저작권 보호에 매우 철저한 회사고 팬아트까지 제재한 전적도 있다.
하지만 대중들이 디즈니 스타일 이미지를 더 많이 만들고 공유할수록, 디즈니의 브랜드 정체성과 존재감은 더 공고해지며, 자발적으로 마케팅해 주게 된다. 특정 이미지를 보고 ‘이거 디즈니 같다’라고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하는 일이며, 공공의 문화 자산이 되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비단 디즈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브리, 디즈니, 심슨 등 거대 IP라면 모두 해당한다. 그들은 ChatGPT 때문에 무단으로 저작권을 침범당하고 있는 것도 맞지만, 간접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다. 이 유행이 강화될수록 다음 세대에서도 그들이 지배적인 미감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며, 미학을 다루는 우리의 감수성이 점차 납작해지고 단순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