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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DC, 개발자 컨퍼런스에 담긴 애플의 브랜딩

애플에서 주최하는 행사는 언제나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이번 WWDC24가 끝난 후에도 어떤 기능이 출시되는지 실시간으로 분석 영상들이 올라왔죠. 이런 흐름을 만들어낸 최초의 시점이 언제였는지 돌아보면 스티브 잡스의 2007년 아이폰 발표와 2008년 아이패드 에어 발표가 아닐까 싶어요.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애플만의 쇼]
애플은 획기적인 제품과 기능을 출시하지만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프레젠테이션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사든 모든 내용을 흥미로운 내용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오프닝이 중요한데요. 스티브 잡스는 일반인들도 쉽게 공감하고 흥분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설계하고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여줍니다. 여기에 소개 멘트는 또 얼마나 웅장한지요. 2007년 발표에선 아이폰을 공개하면서 ‘휴대폰을 재발명’한다고 말했죠.

2008년 아이패드 에어 출시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서류봉투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면서 이 제품이 얼마나 얇은지를 정말 단순하고 원초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들 아마 당시 아이패드의 기능은 기억 못 해도 서류봉투는 기억할 거에요.

애플 행사는 2010년대부터 스페셜 이벤트와 WWDC, 2가지로 좁혀집니다. 매년 9월에 열리는 스페셜 이벤트는 애플의 신제품을 일반 고객 대상으로 공개하는 행사로, 작년엔 아이폰15와 애플워치9 등이 발표됐죠. WWDC는 1987년부터 열린 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WorldWide Developer Conference)로, 매년 6월 애플 엔지니어와 함께하는 100여 개의 세션이 열립니다. 전 세계적인 개발자들을 위한 축제로, 온라인으로 매해 3천만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2010년대까지만 해도 애플 행사는 대규모 컨벤션 센터에서 진행됐습니다. 2011년부터는 팀 쿡이 스티브 잡스의 뒤를 이어받아 위트 있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고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행사에 직접 가고 싶어 했고, 영상으로만 봐도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느껴졌습니다.

2015년 애플 이벤트, 팀쿡의 기조연설

하지만 대부분의 대규모 행사가 그렇듯 코로나 시기를 맞으면서 온라인 중계가 보편화되기 시작합니다. 발표자의 퍼포먼스가 화면으로 전달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 온라인 행사들은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3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도 애플만의 일관된 브랜딩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저는 WWDC에 집중해서 이 컨퍼런스가 이토록 오랜 시간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 그리고 일관된 브랜딩을 반영할 수 있었던 요소가 무엇인지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대감을 심는 오프닝
온라인 행사가 메인인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은 ‘오프닝’입니다. 1시간 30분가량 되는 영상을 보려면 시작부터 엄청난 기대감을 심어주어야 하죠. 오프닝 영상은 전체 내용과 메시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짧고 임팩트가 있어야 합니다. 애플의 역사와 브랜딩을 담으면서 올해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행사의 주제를 1분짜리 오프닝 영상으로 임팩트 있게 보여주면서, 재미까지 주려면 굉장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번 WWDC24 오프닝 영상은 캘리포니아 상공에서 시작합니다. 애플 수석 부사장인 크레이그 페더리기와 개발자들처럼 보이는 직원들이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무지개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낙하하는데요, iOS16 배경 화면이었던 그래픽입니다. 다른 여러 그래픽이 있을 텐데 Apple Pride 그래픽을 사용한 점, 애플의 헤리티지를 반영하는 깨알 디테일인 것 같아 애플 팬으로써 재밌게 봤습니다.

공중에서 에어플레인 모드를 해제하는 위트, 낙하산을 통해 어떤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발표할지 알려주는 힌트, 배경음악을 신나는 록을 사용한 것까지 약 1분짜리 오프닝만으로 에너지를 불어넣어 줍니다.

2. 일관된, 하지만 다채로운 공간 활용
WWDC24 오프닝에서는 낙하산이 애플 파크로 떨어지면서 지붕 위의 팀 쿡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대체로 오프닝 영상 직후에는 상공에서 시작해 애플 파크로 떨어지도록 화면을 연출하죠.

2020년대의 WWDC는 항상 팀 쿡이 애플 파크 어딘가에서 발표를 시작합니다. 애플 파크 가운데의 숲에서, 복도에서, 지하에서 등 매년 애플 파크에서 발표한다는 점이 안정감과 일관성을 줍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무대에서 발표하는 게 너무나 당연했지만, 온라인이라면 굳이 한 무대에만 갇힐 필요가 없습니다. 화면 전환도 자유롭기 때문에 발표 맥락에 맞는 장소에서 말하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고요.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연구실 같은 곳에서 발표가 진행되고, 피트니스 기능이 소개될 땐 숲이 보이는 공간에서 진행됩니다. 실내외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점이 조금 더 발표를 다채롭게 만들어주고, 애플 파크의 구석구석을 보여주기 때문에 애플 팬들에게도 소소한 만족감을 주지 않나 싶네요.

3. 쉽게 기억에 남는 타이틀
애플은 매번 행사의 타이틀에 매력적인 카피를 사용합니다. 오래된 예시지만 2008년 아이패드 에어 공개 때는 “There’s something in the air.”라는 비유적인 카피를 사용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문장만 보면 전혀 제품이나 기술과 관련 없어 보이는 게 매력이죠. WWDC20에서는 “Ready. Set. Code.”를 썼는데, Ready, Set, Go는 우리말로 “준비, 시~작!” 혹은 “준비 되셨나요!”를 의미하는 관용어입니다. 아주 간단한 변형이지만 위트있게 느껴졌습니다. 최근에는 국가별로도 번역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WWDC24는 “Action Packed”가 제목이었는데, 한국에선 “액션 블록버스터”로 번역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타이틀은 “One more thing…”입니다. 2005년 애플 이벤트의 제목이었는데요. 애플 행사에서 오래도록 쓰고 있는 유행어가 됐죠. 작년 WWDC23에선 팀 쿡이 One more thing…을 말하며 비전 프로가 공개됐고요. 여러 번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타이틀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4. 브랜드 자산들의 재조합, 재사용
앞서 Apple Pride 무지개에서 알아차리셨겠지만, 애플은 자신들의 브랜드 자산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WWDC20에서는 iOS12부터 등장했던 Memoji를 활용해 오프닝 영상을 만들었는데요. 지구에 빛나는 점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전 세계의 개발자를 상징하는 미모지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입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확실한 메시지였죠.

이후 WWDC20, 21, 22에서도 모두 미모지가 키비주얼로 등장합니다. 노트북에 스티커가 추가되고, 메시지 버블이 추가되거나, 조명이 바뀌는 등의 작은 변형들은 있지만 다양한 성별, 인종, 스타일의 코딩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통해 ‘모든 개발자들을 위한 컨퍼런스’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애플 이벤트는 항상 애플 로고를 변형한 그래픽을 키비주얼로 씁니다. 그 행사의 주제를 반영한 컨셉으로 진행되는데, 이번엔 어떻게 변형할까? 어디까지 변형될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시각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타이틀이나 주요 멘트도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2006년 애플 이벤트에서 사용한 “It’s Showtime”은 2019년 이벤트 타이틀에서도 사용됐고, 이번 WWDC24 오프닝 영상에서 크레이그가 낙하하기 전에 “It’s Showtime”을 외치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이미 가지고 있는 애플의 수많은 자산들을 재조합하면서 브랜딩을 강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팬들에게는 작은 감동을 주기도 하고요.

5. 동화 같은 스토리텔링
WWDC는 개발자들을 위한 축제인 만큼 오프닝 영상에서도 개발자분들에 대한 응원과 감사, 존경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가장 동화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진 게 WWDC23 오프닝입니다. 이 영상은 집에서 코딩하고 있는 개발자의 모습으로 시작되는데요.

갑자기 이 남자의 머리 위로 비눗방울이 생겨납니다. 집 밖의 사람들에게도 비눗방울이 있는데 각자 다른 모습, 다른 방식으로 생겼습니다. 비눗방울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의미하죠.

그런데 갑자기 이 비눗방울이 도망가고 주인공은 헐레벌떡 뛰쳐나갑니다. 비눗방울이 찻길로 도망가기도 하고, 담을 넘어 높이 날아가기도 하고, 그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쫓아가게 됩니다.

결국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비눗방울을 잡게 된 주인공을 마지막으로, “Dream it, Chase it, Code it”이라는 카피와 함께 끝나게 됩니다. 자유롭게 꿈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코딩하라는 메시지를 동화적으로 표현한 영상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애플은 이런 오프닝 영상뿐만 아니라 광고에도 자주 스토리텔링을 하죠. 2019년 코로나 시대에 함께 일하는 방법을 짧은 드라마로 만든 The Underdogs 시리즈는 작년까지 4편이나 제작됐고, 칸 광고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매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메시지를 꾸준하게 외치고 있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애플은 매번 WWDC 오프닝 영상에서 감각적인 배경음악을 사용합니다. 애플 이벤트를 통해 유명해진 신진 아티스트들도 많습니다. 애플 뮤직에 WWDC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할 정도로 음악에 진심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WWDC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애플 이벤트의 역사와 함께 살펴봤습니다. 기대감을 심는 오프닝 영상, 일관되면서도 다채로운 공간 활용, 쉽게 기억에 남는 이벤트 타이틀, 기존의 브랜드 자산을 영리하게 재조합, 재사용하는 방식, 동화 같은 스토리텔링과 음악에 진심인 모습까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행사이고, 치밀하게 설계됐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내년 WWDC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무척 기대됩니다.

김지윤
김지윤
취향이 담긴 물건과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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