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북촌 중심에 생긴 새로운 예술 공간이 다녀왔습니다. 이름은 ‘미래’를 뜻하는 라틴어 ‘Futura’에서 명칭을 따온 ‘푸투라 서울(Futura Seoul)’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담은 Futura]
Futura는 사실 디자이너에게 굉장히 익숙한 단어인데요, 1927년 독일 디자이너인 폴 레너가 제작한 서체 이름이 바로 Futura거든요. 전통적인 서체와 비교하면 굉장히 기하학적으로 생겼죠. Futura는 20세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기하학적 규칙성을 담고 있지만, 아주 인공적으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폴 레너는 당시에 로마의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단순함과 웅장함을 지닌 서체를 제작하고 싶었다고 해요.
Futura는 정말 많은 브랜드의 로고에 사용된 서체입니다. 나이키, 앱솔루트, 페덱스, 캘빈클라인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죠. Futura 서체 자체가 기하학적으로 생겨서 특징적인 형태로 로고를 만들기 용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하학적 형태가 미래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실제로 ‘푸투라 서울’은 이 서체의 탄생 배경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된 서체지만 미래적으로 느껴지는 Futura 서체처럼, 전통적인 예술과 지금의 예술을 바탕으로 미래를 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해요.
[AI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이름과 포부부터 미래적으로 느껴지는데, 그에 걸맞게 첫 전시는 AI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입니다. 일단 AI로 ‘예술’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이 안 되실 텐데요. 2023년 작품인 <인공 현실: 산호(Aritificial Realities: Coral)>를 먼저 소개해 드릴게요. 가로가 무려 12m인 작품이에요. 거대한 산호 사이에서 웅장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바닷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레픽 아나돌은 기후 변화 문제로 인해 사라져가는 산호에서 영감을 받아 1억 개의 실제 산호 이미지를 사용하여 AI 모델에 학습시켰습니다. 머신러닝으로 만들어진 산호 이미지는 50억 개가 넘고, 이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어 새로운 비주얼과 색상으로 조합하여 구성합니다. 이후 다시 AI를 활용해 6K 해상도로 키운 결과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알고리즘인지 알 수 없지만 레픽 아나돌은 현실에 있을 것 같으면서도 존재할 수 없는 이 환상적인 컨셉을 ‘기계 환각’이라 부릅니다. 그동안 그는 “기계가 학습할 수 있다면 환각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AI보다 ‘기계의 꿈’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더 큰 영감을 받는다고 해요. 대체로 AI가 만든 이미지라고 하면 정말 사진을 찍은 듯한 이미지나 이미 본 적 있는 과거의 데이터를 학습한 현실적인 결과물들을 떠올릴 텐데요. 그래서인지 레픽 아나돌이 AI를 활용하는 방식이 더욱 특별해 보입니다.
레픽 아나돌은 1985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8살 때 첫 컴퓨터를 받았는데요. 그때 그의 인생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는 진짜 인간이 탈출한 복제 인간을 찾아내는 내용으로, 복제 인간들의 기억은 인간들의 기억을 가져온 데이터입니다. 인간의 기억을 학습해 ‘만들어진 감정’을 느끼죠. 레픽 아나돌은 주인공의 대사에 깊은 영감을 받습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은) 당신의 기억이 아니야. 누군가의 것을 가져온 거지.” 그는 이때부터 “기억도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2008년, 아나돌이 23살쯤 되었을 때부터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학교에서는 노래를 만드는 프로그램 ‘퓨어데이터’로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는 파동을 그려냈다고 하고요. 이때부터 그는 소리, 온도를 넘어 기억과 역사, 환경까지 추상적인 데이터들을 익숙하지만 낯선 형태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작업 방식을 ‘AI 데이터 페인팅’이라고 부르는데요. 화가가 물감을 쓰는 것처럼 그는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이죠. 위 작품에서는 산호가 데이터이고요.
[기계 환각(2024)]
푸투라 서울에서 본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기계 환각> 시리즈였습니다. 4억 개가 넘는 동물 이미지 데이터를 활용한 <동물>, 1억 5,500만 개의 자연 풍경 이미지를 활용한 <풍경>, 수백만 장의 식물 이미지를 활용한 <식물>까지, 3개의 작품이 높이 10m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재생됩니다. 어찌 보면 그냥 구글에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을 대충 긁어모아서 학습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레픽 아나돌은 데이터 수집의 ‘윤리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모두에게 공개된 오픈소스 데이터만 사용하거나, 실제 열대 우림 지역에 찾아가 원주민과 생활하며 직접 공수해 왔다고 해요.
한눈에 다 담을 수도 없이 큰 스크린에 끊임없이 파장을 만들며 넘실대는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실제 자연을 담은 것 같기도, 인공적인 액체 같기도 합니다. 정말 환각을 보는 듯한 놀라운 영상에 꼬박 30분을 누워서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미술관에 이렇게 오래 앉거나 누워서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어찌 보면 그냥 움직이는 이미지인데 넋 놓고 보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작업으로 작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었던 가 있습니다. ‘감독 되지 않은’, ‘지도 되지 않은’이라는 뜻의 작품인데요. 뉴욕 현대미술관의 138,151개 작품 데이터를 학습했습니다. 어떤 알고리즘으로 구현했는지 이해하고 싶지만 참 어려운데요. StyleGAN2 ADA를 사용하여 이미지 데이터를 주제별로 클러스터링하고, 데이터의 맥락을 반영해 학습했다고 합니다.
AI가 만들어낸 자동적이고 우연적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설계한 정교한 알고리즘과 정제된 데이터로 제작된다는 것이 참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기계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순수한 예술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실제로 평단에서는 “5억짜리 화면보호기 같다”는 말도 나왔다고 합니다. AI가 예술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의견도 나오고요. 하지만 쇼츠와 릴스에 빠져 1분도 가만히 감상을 못 하는 요즘인데, 이 작품의 평균 관람 시간은 38분이라고 해요. 논란은 많지만 모두가 원초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죠. 예술의 범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AI와 인간, 그리고 자연]
AI가 인간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AI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AI가 모든 걸 학습해서 파멸에 이르는 건 아닐까? AI가 처음 태동했을 때 모든 사람이 가졌던 불안과 의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죠. 레픽 아나돌은 AI가 인류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사생활과 자유 의지가 위태로울 수 있고, AI는 잠재력이 크지만 때로 윤리적 문제 혹은 불평등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AI는 인간이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레픽 아나돌은 AI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그림 그릴 줄은 모르지만 꿈을 꾸는 방법을 알고, 컴퓨팅을 아니까요. 그는 루이지애나 인터뷰에서 예술가는 자신이고, 인간이며, AI는 자신의 마음의 확장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기계와의 ‘공동 창조’라고요. 확실히 그의 행보는 AI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는 특히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나이, 배경, 문화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우리 인간을 진정으로 연결해 주는 가장 포괄적인 주제이기 때문인데요. 자연을 모르는 인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나돌의 의도대로 모두가 감상하고, 연결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로 퍼져나가는 듯합니다.
“꼭 작품의 맥락이나 정보를 이해해야만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저는 예술이 우리의 정신을 치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상태를 보는 것이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