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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통통한 슈파겔, 맛있게 즐겨보자!

삶에 위안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일상에서 맛난 요리를 누리는 것만큼 확실하고 커다란 위안을 주는 것도 드물 텐데요. 식탁 위에 야채 요리가 메들리로 올라가도 행복한 야채 애호가라면, 신선한 야채는 그 자체로 삶의 활력소가 되죠. 고기 없인 살아도 야채 없이는 못 산다는 야채 사랑꾼이 대형 마트에서 요즘 자주 픽업해오는 야채는 슈파겔, 즉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사진 출처: Unsplash

제철은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지만 요즘 이마트 같은 대형 마트에서는 한겨울에도 출몰하는 채소가 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본향의 그 토실토실 슈파겔만큼은 아니어도 꽤 굵직한 몸체에 깃든 고유의 짙은 향미와 부드러운 단맛은 본고장 맛에 못지않은데요. 특유의 향미와 감칠맛을 포기할 수 없어 자주 데려오곤 합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그릴드, 즉 굽는 것도 좋은 방법.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슈파겔을 올려, 중간 정도 세기의 불에 천천히 구우면 차오르는 단맛과 감칠맛이 그만인데요. 암염만 솔솔 뿌려도 엑기스처럼 응결된 UMAMI가 입안에서 춤을 춥니다. 또 다른 스피디 요리로는, 올리브유를 두른 내열 접시에 컬리플라워 등 적당한 야채, 슈파겔, 달걀, 에멘탈 치즈 등을 올려 230도 오븐에서 5~7분 굽는 것. 물론 본향처럼 버터, 레몬즙, 노른자가 하모니를 이룬 홀렌다이즈 소스(Sauce Hollandaise)를 곁들여 정석의 진미를 누릴 수도 있고요.

슈파겔의 농후한 풍미를 온전히 만끽하고자 할 때 리소토(risotto)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슈파겔 껍질은 단단해서 반드시 깎아내야 하지만 바로 이 껍질에 짙은 향과 풍미가 고여 있거든요. 그러니 슈파겔을 데칠 때는 껍질도 함께 넣어야 해요. 껍질이 합류해 한층 농후한 풍미가 고인 이 데친 물만 있으면 따로 채수나 육수도 필요 없습니다.

데친 슈파겔은 좀 굵게(식감을 즐길 수 있게) 어슷썰기 해두고(그린 아스파라거스도 있다면, 그린 아스파라거스는 데치지 않고 어슷썰기), 먼저 팬에 올리브유와 다진 양파를 볶다 부드러워지면 씻어 둔 생쌀을 더해 볶고, 쌀이 투명해지면 슈파겔과 슈파겔 데친 물을 부어(쌀과 슈파겔이 잠길 만큼) 볶아 줘요. 물이 없어지면 다시 데친 물을 부어 볶고, 이어서 그린 아스파라거스를 더해 섞고(그린빈이 있다면 그린빈도 넣고요), 또 물이 없어지면 슈파겔 데친 물을 다시 더해 쌀이 부드러워질 때까지만 끓이다가 소금 간, 그리고 마지막에 버터를 더해 섞으면 끝!

접시에 올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등 기호에 맞는 경성 치즈 솔솔 뿌리면, 아니? 슈파겔에서 이런 맛이?? 할 만큼 농후한 향과 감칠맛이 뿜어져 나온답니다. 별 솜씨도 요하지 않는, 어쩌면 가장 쉽게 슈파겔을 만끽할 요리…

5~6월의 독일을 경험한 분이라면 다 아실 텐데요. 우리에게 봄이 쑥, 달래, 냉이 같은 나물의 계절이듯, 독일인들에게 봄(조금 늦봄..)은 슈파겔에 푹 빠지는 계절이기도 하죠. 마르쉐에도 여기저기 식당의 식탁에도 슈파겔이 약진하는 계절. 1인분에 대개 오동통한 슈파겔 6~7개 삶은 것에 삶은 감자를(때로는 햄도) 함께 내주는 디쉬가 단골 메뉴인데, 슈파겔의 고소함에 감자의 고소함을 얹은 그 합이 일품이죠.

사진 출처: Unsplash

독일 남부에 위치한 뷔르템베르크(Baden Württemberg)주의 슈베칭겐성(Schloss Schwetzingen) 앞에는, 슈파겔을 파는 가게 주인을 모델로 한 제법 큰 동상도 있어요. 오죽 좋으면 동상까지 만들었을까 싶은데요. 독일인의 그토록 깊은 슈파겔 사랑에는 다 이유가 있죠. 첫째는 응당 맛이 좋아서일 테고, 두 번째는 소비자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리미티드 에디션’ 야채여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출하 기간까지 지정된 특별한 야채이거든요.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신 대축일 이전까지만 출하를 허용하니 애가 닳을 만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4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만 수확하게 하는데요(슈파겔은 다음 해 품질관리를 위해 첫서리 전 100일 이상 휴지기를 둬야 하기 때문. 단, 7년 차 농원의 경우는 휴지기 없이 가니 좀 더 출하 기간이 긴데, 슈파겔은 7년 동안 자라고 나면 다시 새로 심어줘야 하는 작목이라 휴지기가 필요 없는 거죠. 그러니 운이 좋다면 성 요한의 날 이후도 슈파겔을 만날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서울에는 그런 제한도 없고 잘만 찾아보면 사계절 즐길 수 있는 상황. 그 자체로 맛난 소재이니 이런저런 요리에 응용도 쉽고, 자주 장바구니에 들어가 마땅한 야채.

사진 출처: thecheeseatlas.com

사족 하나. 20대 후반 무렵 홀로 낯선 도시에서 영화를 본 뒤 들어간 식당에서 만났던 슈파겔도 참 맛났습니다. 부드럽게 녹인 에푸아스(Époisses)에 슈파겔을 찍어 먹는 심플한 요리였는데요. 워시 타입 치즈(wash type cheese)의 대표주자인 에푸아스는 ‘에푸아스 드 부르고뉴’(Époisses de Bourgogne)라고도 불리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와인 명산지 부르고뉴가 본향. 브랜디로 씻어가며 숙성시킨, 그 자체로 깊고 농후한 맛인데 여기에 또 다른 고소함의 진수 슈파겔까지 가세하니 UMAMI에 UMAMI를 얹은 격. 맛이 없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에푸아스는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스푼으로 떠먹는 식후 디저트로도, 또 바게트 등 빵에 발라 먹는 것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맛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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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자란 디저트 애호가 이야기야말로 맛을 배가시킬 가장 빛나는 재료라 믿는 사람 네 가지 직업을 거쳐 현재 이야기꾼이자 디저트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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