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위안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일상에서 맛난 요리를 누리는 것만큼 확실하고 커다란 위안을 주는 것도 드물 텐데요. 식탁 위에 야채 요리가 메들리로 올라가도 행복한 야채 애호가라면, 신선한 야채는 그 자체로 삶의 활력소가 되죠. 고기 없인 살아도 야채 없이는 못 산다는 야채 사랑꾼이 대형 마트에서 요즘 자주 픽업해오는 야채는 슈파겔, 즉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제철은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지만 요즘 이마트 같은 대형 마트에서는 한겨울에도 출몰하는 채소가 된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본향의 그 토실토실 슈파겔만큼은 아니어도 꽤 굵직한 몸체에 깃든 고유의 짙은 향미와 부드러운 단맛은 본고장 맛에 못지않은데요. 특유의 향미와 감칠맛을 포기할 수 없어 자주 데려오곤 합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그릴드, 즉 굽는 것도 좋은 방법.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슈파겔을 올려, 중간 정도 세기의 불에 천천히 구우면 차오르는 단맛과 감칠맛이 그만인데요. 암염만 솔솔 뿌려도 엑기스처럼 응결된 UMAMI가 입안에서 춤을 춥니다. 또 다른 스피디 요리로는, 올리브유를 두른 내열 접시에 컬리플라워 등 적당한 야채, 슈파겔, 달걀, 에멘탈 치즈 등을 올려 230도 오븐에서 5~7분 굽는 것. 물론 본향처럼 버터, 레몬즙, 노른자가 하모니를 이룬 홀렌다이즈 소스(Sauce Hollandaise)를 곁들여 정석의 진미를 누릴 수도 있고요.
슈파겔의 농후한 풍미를 온전히 만끽하고자 할 때 리소토(risotto)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슈파겔 껍질은 단단해서 반드시 깎아내야 하지만 바로 이 껍질에 짙은 향과 풍미가 고여 있거든요. 그러니 슈파겔을 데칠 때는 껍질도 함께 넣어야 해요. 껍질이 합류해 한층 농후한 풍미가 고인 이 데친 물만 있으면 따로 채수나 육수도 필요 없습니다.
데친 슈파겔은 좀 굵게(식감을 즐길 수 있게) 어슷썰기 해두고(그린 아스파라거스도 있다면, 그린 아스파라거스는 데치지 않고 어슷썰기), 먼저 팬에 올리브유와 다진 양파를 볶다 부드러워지면 씻어 둔 생쌀을 더해 볶고, 쌀이 투명해지면 슈파겔과 슈파겔 데친 물을 부어(쌀과 슈파겔이 잠길 만큼) 볶아 줘요. 물이 없어지면 다시 데친 물을 부어 볶고, 이어서 그린 아스파라거스를 더해 섞고(그린빈이 있다면 그린빈도 넣고요), 또 물이 없어지면 슈파겔 데친 물을 다시 더해 쌀이 부드러워질 때까지만 끓이다가 소금 간, 그리고 마지막에 버터를 더해 섞으면 끝!
접시에 올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등 기호에 맞는 경성 치즈 솔솔 뿌리면, 아니? 슈파겔에서 이런 맛이?? 할 만큼 농후한 향과 감칠맛이 뿜어져 나온답니다. 별 솜씨도 요하지 않는, 어쩌면 가장 쉽게 슈파겔을 만끽할 요리…
5~6월의 독일을 경험한 분이라면 다 아실 텐데요. 우리에게 봄이 쑥, 달래, 냉이 같은 나물의 계절이듯, 독일인들에게 봄(조금 늦봄..)은 슈파겔에 푹 빠지는 계절이기도 하죠. 마르쉐에도 여기저기 식당의 식탁에도 슈파겔이 약진하는 계절. 1인분에 대개 오동통한 슈파겔 6~7개 삶은 것에 삶은 감자를(때로는 햄도) 함께 내주는 디쉬가 단골 메뉴인데, 슈파겔의 고소함에 감자의 고소함을 얹은 그 합이 일품이죠.
독일 남부에 위치한 뷔르템베르크(Baden Württemberg)주의 슈베칭겐성(Schloss Schwetzingen) 앞에는, 슈파겔을 파는 가게 주인을 모델로 한 제법 큰 동상도 있어요. 오죽 좋으면 동상까지 만들었을까 싶은데요. 독일인의 그토록 깊은 슈파겔 사랑에는 다 이유가 있죠. 첫째는 응당 맛이 좋아서일 테고, 두 번째는 소비자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리미티드 에디션’ 야채여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출하 기간까지 지정된 특별한 야채이거든요.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신 대축일 이전까지만 출하를 허용하니 애가 닳을 만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4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만 수확하게 하는데요(슈파겔은 다음 해 품질관리를 위해 첫서리 전 100일 이상 휴지기를 둬야 하기 때문. 단, 7년 차 농원의 경우는 휴지기 없이 가니 좀 더 출하 기간이 긴데, 슈파겔은 7년 동안 자라고 나면 다시 새로 심어줘야 하는 작목이라 휴지기가 필요 없는 거죠. 그러니 운이 좋다면 성 요한의 날 이후도 슈파겔을 만날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서울에는 그런 제한도 없고 잘만 찾아보면 사계절 즐길 수 있는 상황. 그 자체로 맛난 소재이니 이런저런 요리에 응용도 쉽고, 자주 장바구니에 들어가 마땅한 야채.
사족 하나. 20대 후반 무렵 홀로 낯선 도시에서 영화를 본 뒤 들어간 식당에서 만났던 슈파겔도 참 맛났습니다. 부드럽게 녹인 에푸아스(Époisses)에 슈파겔을 찍어 먹는 심플한 요리였는데요. 워시 타입 치즈(wash type cheese)의 대표주자인 에푸아스는 ‘에푸아스 드 부르고뉴’(Époisses de Bourgogne)라고도 불리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와인 명산지 부르고뉴가 본향. 브랜디로 씻어가며 숙성시킨, 그 자체로 깊고 농후한 맛인데 여기에 또 다른 고소함의 진수 슈파겔까지 가세하니 UMAMI에 UMAMI를 얹은 격. 맛이 없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에푸아스는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스푼으로 떠먹는 식후 디저트로도, 또 바게트 등 빵에 발라 먹는 것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맛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