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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의 매력을 아시나요?

세계 어느 도시를 가나 입맛 돋우는 요리가 즐비한 곳은 대개 술을 파는 식당이죠. 조금 센 간에 농후한 감칠맛을 얹은 요리, 곧 술안주가 술을 입안으로 착착 불러들이는 곳. 따지고 보면 맛난 요리란 술을 파는 식당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필요조건인데요. 스페인의 술을 파는 식당 즉 ‘바르’(bar) 역시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곳입니다.

필자가 본 바르셀로나의 ‘바르’는 세 가지. 메뉴판을 기준 삼은 조금은 희한한 관점인데요. 여행자를 위해 영어 메뉴를 겸비한 곳, 주로 로컬들의 출입처라 스페인어 메뉴만 있는 곳, 그리고 제법 유서 깊어 보이고 스페인 고유의 정취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지만 달랑 카탈루냐(Cataluña)어 메뉴만 있는 곳. 저의 경험으로는 이 카탈루냐어 메뉴뿐인 곳이야말로 진미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손님은 온통 골수 스페인인이고, 여기저기 카탈루냐어가 들리니 그곳이야말로 본격 스페인 요리가 있는 곳일 수밖에요.

요즘에야 ‘AI 통역’이란 게 있지만, 한때는 까막눈을 의탁할 곳이라고는 전후좌우 이웃 탁자에 놓인 요리들뿐이었죠. 타파스(Tapas, 작은 접시에 소량 담아내는 스페인의 다양한 전채요리)와 핀초스(Pintxos, 얇게 썬 바게트 위에 요리를 올려 핀초=핀으로 고정한, 특히 스페인 북부 바르에서 흔히 보는 메뉴) 등을 흘깃거리다가 향이 그럴싸하면 하나둘 주문하는 식이었는데요. 모두 무릎을 ‘탁’ 칠 만큼 맛났어요. 이베리아반도의 산과 들과 지중해의 은혜를 입은, 비할 데 없이 좋은 풍미의 식재료들이 내는 ‘UMAMI'(깊고 진한 감칠맛) 대행진. 그리스 요리, 모로코 요리, 이탈리아 요리와 함께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중해 요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요리들이었습니다.

결국 체류 내내 카탈루냐어 메뉴판뿐인 바르만 계속 가게 되었는데요. 여러 바르를 전전하다 정착한 그 바르에서 완전히 맛의 포로가 된 메뉴가 바로 파프리카가 올라간 핀초스! 그 파프리카는 정확히 설명하자면, 카탈루냐 향토요리 중 하나인 에스깔리바다(Escalivada). (카탈루냐어로는 에스깔리바(Escalivar)라고 해요.) 본래 에스깔리바다란 파프리카뿐 아니라 가지, 피망, 토마토, 양파 등 야채를 구워 올리브오일에 마리네(mariner)한 것을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파프리카로 만든 에스깔리바다를 올린 핀초스의 출중한 맛에 혀가 톡 꽂혀 버린 거죠.

표류한 바르 중에는 핀초스 한둘을 서비스로 내주는 곳도 있었는데, 모든 바르에서 먹은 핀초스를 통틀어서도 가장 맛났던 게 이 파프리카 핀초스. 에스깔리바다(파프리카)를 바게트에 올리고 그 위에 앤쵸비, 또 그 위에 풍미 좋은 올리브를 올린 핀초스 말입니다. 이 단조로운 조합이 뿜어내는 맛이 어찌나 훌륭한지…

파프리카 핀초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센불에 지그시 구워 고유의 시원한 단맛을 한껏 끌어올린 파프리카를 신선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과 마늘에 한참 재웠다가, 고소하디 고소한 바게트에 올리고, 그 위에 짭조름하고 농후한 바다의 맛을 품은 앤쵸비를, 또 그 위에 풍미 좋은 올리브오일 한껏 머금은 탱글탱글한 올리브라니… 빵 위에서 오밀조밀 삼합이 딱 맞아떨어진 그 맛, 최고가 아닐 수 없죠.

그로부터 얼마 후, 예나 지금이나 레시피의 보고인 도쿄의 서점에서 흡족한 레시피를 찾아냈고, 맛의 기억을 더듬어 급기야 똑같은 맛을 만들어냈었죠. 그렇게 단번에 만들 수 있었던 건 또렷한 맛의 기억도 일조했지만, 무엇보다도 만들기가 너무도 쉬웠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일상에 녹아든 요리란 대개 쉽기 마련이죠. 에스깔리바다도 스페인인에게는, 특히 카탈루냐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상의 요리. 우리네 일상의 먹거리 반찬 같은 거니까요.

이번에 알려 드리고자 하는 레시피는, 가지나 양파 등을 더해 만드는 것이 아닌, 그냥 심플하게 파프리카만으로 만드는 버전의 에스깔리바다입니다. 재료가 심플한 만큼 쉽기도 쉽지만, 파프리카만으로도 충분히 맛나거든요. 또, 알려진 바와 같이 파프리카는 비타민C의 보고. 건강에도 유익한 파프리카를 고유의 향미와 풍미, 상쾌한 단맛을 증폭시킨 에스깔리바다로 변신시키면, 이런저런 요리에서 최강 천연 조미료로 활약하게 된답니다. 이 ‘파프리카 only’ 에스깔리바다는, 굳이 다른 재료와의 협연 없이도 그 자체로 이미 맛난 요리예요.

먼저 파프리카 겉면을 고루 태워야 하는데요. 그렇게 겉을 태우는(굽는) 이유는 감칠맛을 응축시키기 위한 건데, 토칭도 좋지만 토칭은 초보자에게는 의외로 번거롭습니다. 구운 파프리카가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껍질을 까야 하는데, 검은 재가 자꾸 파프리카에 묻는 등 원활하게 잘 안 까지거든요. 겉을 태운 파프리카를 바로 얼음물에 담가 급속 냉각한 뒤 까면 비교적 잘 까지지만, 이렇게 하면 모처럼 과육에 응축된 감칠맛 성분이 상당 부분 씻겨 나갑니다. 가정에서 보다 손쉽게 굽고 껍질까지 깨끗이 까는 방법은… 오븐 사용이 정답!

조리용 장갑을 끼고 파프리카 겉면에 올리브오일을 두루 발라 준 다음, 유산지나 알루미늄 포일을 깐 배트(vat, 직사각형 내열 용기) 등에 담고, 230도로 예열한 오븐에 넣어 30분~40분만 구워요. 이렇게 굽는 동안 껍질과 과육이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오븐에서 꺼내자마자 조리용 핀셋 등으로 껍질을 살살 잡아당기면 단번에 스르르 벗겨져요. 시간도 절약되고 수고도 줄이는 유일한 방법!

구운 파프리카 껍질을 핀셋으로 벗기면 쉬워요.

이렇게 구워서 껍질을 깨끗이 깐 파프리카(7~8개 기준)가 준비되었다면, 그다음은 다지거나 편으로 썬 마늘(2톨쯤), 소금 1/3작은술, 통후추 약간, 발사믹 비니거 1큰술, 오레가노(말린 것) 1/2작은술,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약50cc)을 잘 섞어 둔 밀폐용기에, 파프리카를 차곡차곡 담으면 끝. 다 담았으면 랩 한번 씌우고, 밀봉한 다음 하룻밤 냉장 후, 필요한 만큼 꺼내 쓰면 됩니다.

구운 파프리카를 마리네이트하여 에스깔리바다 완성
파프리카와 엔쵸비를 사용한 에스깔리바다

에스깔리바다의 ‘에스깔라’(Escala)란 카탈루냐어로 ‘계단’을 뜻하는데요. 야채를 층층이 쌓아 올리듯 놓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마리네이트한 파프리카를 길게 세로로 찢은 다음, 이름처럼 접시 위에 나란히 정렬시키고, 그 위로 앤쵸비를 뜨문뜨문 올리면 훌륭한 스페인 요리 한 접시가 완성됩니다. 여기에 딜이나 파슬리 등 좋아하는 허브만 조금 올리면, 스페인 바르에서 내주는 그 디쉬가 되는 거죠. 술안주나 샐러드도 되고, 팬에 올리브오일을 둘러 바삭하게 구워낸 빵에 올리면 훌륭한 한 끼도 되는 요리. 이걸로 리소토를 만들어도 맛나고, 리소(riso. 쌀알 모양의 파스타)나 리가토니(Rigatoni) 등 쇼트 파스타랑도 잘 어우러지고요. 넉넉히 만들어 냉장해 두면 세상 편하고, 요리의 비주얼과 맛도 고품격으로 승화시켜 주는 주방의 비밀병기라고나 할까요?

에스깔리바다 리소 파스타
에스깔리바다 리가토니

집에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을 때 와인과 페어링해 내놓기도 좋아요. 특별한 손님을 초대한 식탁에 조금 특별한 전채를 내고 싶을 때도 유용합니다. 낮은 원통형 틀에 길게 찢은 에스깔리바다를 쌓아 올리고, 살짝 눌러 형태를 잡아준 다음 틀을 빼고, 그 위로 팬에 구운 새우만 올려도 근사한 스페니쉬 디쉬 탄생. 일종의 테린(terrine, 재료를 틀에 눌러 담은 프랑스 요리)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딜 등 허브 흩뿌리고 올리브오일 한 바퀴 두르면 아껴둔 와인도 콸콸 부어 마시게 될 맛…

새우를 올린 에스깔리바다 테린

파프리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맛난 파프리카 활용법 하나 더… 바쁜 일상에서 파프리카의 참맛을 초고속으로 누리고 싶을 때 좋은 방법이에요. 파프리카소스가 바로 그것인데, 출처는 오래전 도쿄의 작은 스페니쉬 식당 쉐프님으로부터. 이 소스는 필요시마다 만들어도 되지만, 활용의 폭이 드넓으니 넉넉히 만들어 두면 좋을 특급 천연 조미료이기도 한데요. 파스타 소스 말고도, 샐러드 드레싱으로, 또 오믈렛이나 삶아서 으깬 감자의 토핑용으로도 뛰어난 상성.

노랑 파프리카소스를 토핑으로 얹은 오믈렛
으깬 감자에 파프리카소스 토핑

파프리카 2개 기준
1. 파프리카는 씨와 꼭지를 제거 후, 잘게 썰어 둬요. 양파도 있다면 반 개쯤 다져 둬요.
2. 팬에 올리브유 1큰술쯤 두르고, 앤쵸비 3마리 으깨 넣고, 다진 마늘(1~2톨)도 더해 마늘에 엷은 갈색빛이 돌 때까지 볶아요.
3. 여기에 썰어 둔 파프리카를 더해요. 토마토도 있다면 씨 제거 후 잘게 썰어 함께 넣어요.
4. 오레가노(말린 것. 없다면 바질 다진 것으로 대체 가능)도 1작은술 넣고, 파프리카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으면 끝(처음부터 끝까지 중불 유지)!

    파스타 소스로 쓸 경우(1인분)
    1. 팬에 올리브오일 1큰술과 함께 이 파프리카소스 1국자쯤을 데워요.
    2. (삶고 있는 파스타를 건지기 1분 전쯤의) 면수 1국자를 소스에 붓고 재빨리 저어 유화시켜요.
    3. 삶은 파스타를 휘리릭 섞으면 끝!
    접시에 담은 후 올리브오일 휘리릭 한 번 더 두르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 파스타도 기왕이면 가늘어서 소스를 잘 머금는 카펠리니(Capellini)가 좋죠. 아니면 콘치글리(conchiglie. 조개 껍데기 모양의 파스타)같은 쇼트 파스타도 조화롭고요. 입안에 한입 머금을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농후한 천연 조미료의 융단 폭격에, 분명 ‘아니 파프리카가 이렇게나 맛있었나??!’ 하실 겁니다.

    레드 파프리카소스의 콘치글리 파스타 디쉬

    오늘은 스페인 요리 등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파프리카에 관해 이야기했는데요. 사실 파프리카는 여러 나라 미식에서 위력을 발휘해 왔죠. 그리스, 크로아티아 등 발칸반도 연안의 나라를 여행해 본 분이라면 드셔 보았을 ‘에처’(Ajver)도 그 예. 에처는 발칸반도의 향토 요리로 대표되는 파프리카와 가지의 페이스트인데요. 파프리카는 여기서도 감칠맛을 극대화하는 요소죠. 태우고 껍질 벗기는 것까지는 에스깔라바다와 같은데, 이것을 갈아서 페이스트화하고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 것이 에처. 그저 피타(Pitta)같은 빵에 발라 먹기만 해도 맛나고, 역시 파스타나 고기 요리 등에서도 빛나는 조연이 되는 만능 양념인데요. 야채가 부족해지기 쉬운 겨울에 대비해 담그던 우리네 김장처럼, ‘에처’도 본래는 추운 겨울이 오기 전 집집마다 담그던 장기 저장식품. 각 가정의 찬장에 상비해 둘 만큼 요긴한 이 식품의 깊은 감칠맛의 요체도 파프리카인 것.

    오늘날 유럽의 식탁을 주름잡는 주요 채소 중에는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가 중남미 지역에서 유럽으로 갖고 들어온 것들이 많습니다. 오이, 토마토, 감자, 고추 등도 이역만리에서 건너온 것들인데요. 헝가리가 그 고추를 품종 개량해 만든 것이 파프리카. 그런 만큼 헝가리 요리에서 파프리카는 불가결한 재료가 되었죠. 현재도 헝가리는 미국, 스페인 등과 함께 파프리카 생산 대국. 헝가리 요리에서는 파프리카를 주로 말리고 분말화해 향신료로 쓰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야채와 고기를 넣은 헝가리식 수프 ‘굴라쉬’죠(원어로는 gulyás. 참고로, 비슷한 독일의 ‘Gulasch’는 스튜). 그밖에 모로코 요리, 터키 요리 등에서도 또 다른 모습으로 활약하는 파프리카. 나라마다 언어가 달라지고 사람의 기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식재료 하나도 지역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변모해 간 거죠.

    일상의 식탁이란 그 식탁에 앉는 사람의 세계관이 드러나는 여러 통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미식도 세계와 연결되는 여러 지점 중 하나니까요. 좁고 깊게 하나의 세계를 파는 사람, 여러 세계를 두루 돌며 확장하는 사람. 흡사 여행과도 같은데요. 어느 쪽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넓히며 축적된 경험이 다양한 형태로 일상에 반영될 때, 일도 삶도 더 풍요로워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다채로운 요리가 오르는 식탁이 은연중에 생각의 지경을 넓혀 준다고 믿어요. 요리는 요리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무한한 세계를 품고 있으니까요. 가정의 식탁에도 문호 개방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늘 먹는 일상의 음식, 특히 ‘가정의 식탁’에 다채로운 이국의 요리들이 늘어날 때 미식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것은 물론이요, 넓은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요리란 삶의 확장으로 통하는 가장 큰 길목. 다채로우면 다채로울수록 더 많은 세상과 만나게 될 요리들. 이 계절, 파프리카로 한번 여행을 떠나 보시기를!

    by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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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에서 자란 디저트 애호가 이야기야말로 맛을 배가시킬 가장 빛나는 재료라 믿는 사람 네 가지 직업을 거쳐 현재 이야기꾼이자 디저트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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