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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양조장, ‘브루어리 을를’

미국의 크래프트 양조장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브루어 협회(Brewers Association)에서는 크래프트 양조장을 작고 독립적인 양조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크래프트 맥주의 특징은 한마디로 혁신입니다. 규모가 작고 독립적이어야만 역사적인 맥주를 끄집어내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크래프트 양조장은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큰 덕목입니다. 그래서 크래프트 양조장은 지역 사회에서 활동하고, 지역의 식문화에 기여하며,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하여 맥주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수제 맥주라 부른 크래프트 맥주를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지비루(地ビール)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컬리티야말로 크래프트 맥주의 가장 큰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이천 증포동 요골마을에 자리 잡은 브루어리 을를

경기도 이천 증포동에 위치한 브루어리 을를은 2024년에 새로 생긴 맥주 양조장입니다. 증포동에는 과거 요골마을이라고 불렸던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이 주변은 이천의 중심으로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을 정도의 주거 밀집 지역입니다. 주변이 모두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는데 을를이 자리 잡고 있는 곳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개발이 덜 된 곳입니다. 조용한 마을이라는 뜻의 요골은 주변에 아파트가 생기면서 땅값이 오르고 시끌벅적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 땅을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300년간 보유하고 있던 한 청년은 이 땅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이 땅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긴 고민 끝에 크래프트 맥주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맥주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정빈 책임양조사

을를의 이윤제 대표는 영국 유학 중에 펍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한국에서 맥주와 관련된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대표는 외국에서 와인 경영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상업 맥주 양조에 관해서라면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문 양조사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떠올린 인물이 맥주 공방에서 홈브루잉을 하면서 만난 지금의 책임 양조사 정빈입니다. 정빈 양조사는 이미 맥주 씬에서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2014년부터 온라인에서 활동하며, 2018년부터 유튜브에서 ‘명품맥덕’이라는 이름으로 맥주를 리뷰하고 있습니다. 흔하지 않은 맥주 콘텐츠 제공사 사이에서 구독자가 3만 명이 될 정도로 명성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정빈 양조사는 비어랩 맥주 공방에서 조합원으로 일하면서 맥주를 양조하고 맥주를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을를 프로젝트가 시작할 즈음인 2018년에 이천으로 이사와 새로운 맥주 인생을 열었습니다.

브루어리 을를의 콜라보 맥주들. 왼쪽부터 리히텐하이너, 세종, IPA

2018년부터 시작한 을를 프로젝트는 2023년 10월 오픈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양조장을 준비하는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양조장 준비 기간에 시작한 것인 선배 양조장과의 협업입니다. 해외에서는 양조장 간의 협업 맥주가 흔하여 이를 콜라보레이션 맥주라고 부르지만, 한국에서는 진정한 협업 맥주가 많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미국이나 영국 출신의 외국인 양조가들이 뭉쳐서 만든 정도입니다. 을를은 그동안 양조장 설립에 도움을 준 선배 양조장과 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크래프트 맥주는 협업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양조장은 을를에 도움을 줄 수 있어도 을를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배 양조장은 을를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맥주에 대한 아이디어나 라벨링, 브랜딩은 을를에서 담당하고, 레시피는 공동으로 설계했으며, 양조는 선배 양조장에서 했습니다. 되도록 선배 양조장들이 그동안 잘해온 스타일을 재해석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콜라보 맥주에는 사우어 맥주에 일가견이 있는 태평양조와 함께한 히스토릭 에일, 정통 독일 맥주를 표방하는 툼브로이와 함께한 바이젠복, 우리나라 보리로 맥주를 생산하는 UF Beer와 함께한 세종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태평양조와 함께 양조한 히스토릭 에일의 양조 과정이 매우 흥미를 끕니다. 바로 ‘미지수’라는 맥주입니다.

태평양조는 2023년에 설립되어 비록 역사가 짧을지라도, 양조장의 대표는 안동맥주를 설립하고 오랫동안 좋은 맥주를 많이 양조해 낸 실력자입니다. 한국에서 흔하지 않은 팜하우스 에일과 와일드 에일을 전문적으로 양조합니다. 정빈 양조사는 태평양조에 한국에는 없는 맥주 스타일을 제안했습니다. 정빈 양조사가 맥주 여행 중에 마셔본 적이 있었던 히스토릭 에일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독일의 히스토릭 에일인 리히텐하이너를 재해석하기로 한 것입니다. 리히텐하이너는 훈연한 몰트를 사용한 스모크 비어이자 산미가 있는 사우어 에일입니다. 독일에서도 몇 안 남은 히스토릭 에일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는 리터구츠의 리히텐하이너가 수입된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보통 훈연을 할 때 너도밤나무를 사용합니다. 미지수는 참나무를 사용했습니다. 국내에서 독일의 훈연 맥주를 접할 때 오히려 그 향을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아, 한국적인 참숯 향이 맥주에 은은하게 배기를 의도했습니다.

훈연 맥주를 양조하는 과정은 두 번 다시 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지인의 바비큐 전문 식당에서 바비큐 기계를 빌려 맥아에 훈연을 입혔습니다. 우선 바비큐 트레이에 맥아를 얇게 펼치고 물을 뿌립니다. 수분이 훈연향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뚜껑을 닫고 훈연 과정을 지켜봅니다. 너무 고온에서 건조하면 효소가 죽기 때문에 최대한 저온에서 지속해야 합니다. 물이 증발하면 다시 뿌려주고 뒤집어주기를 반복합니다. 이렇게 75킬로의 맥아를 훈연하는 데 16시간이 걸렸습니다. 밀실에서 화생방을 하듯 작업한 결과 그때 입은 옷에 베인 향이 아직도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지수의 또 다른 양조 과정은 맥주에 신맛을 입히는 사우어링입니다. 보통 3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사용합니다. 쿨쉽에서 맥즙을 식힐 때 자연 상태의 유산균이 맥주에 입히는 자연 발효 과정과 맥즙에 유산균을 강제로 투입하는 케틀 사우어링, 그리고 젖산을 넣어서 바로 pH 수치를 떨어뜨려 신맛을 내는 과정이 있습니다. 미지수는 훈연의 강도를 약하게 줬기 때문에 산미에서는 킥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미지수는 이를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최근 사용하고 있는 필리 사우어라고 불리는 새로 발견된 효모를 이용했습니다. 이 효모는 발효하면서 산을 같이 만드는데, 오염 문제도 없고 깔끔한 신맛을 냅니다.

을를은 이제 콜라보 맥주의 경험과 선배 양조사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직접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을를이 추구하는 양조 철학은 대중적이면서도 비어 긱스(Beer Geeks)가 만족하는 맥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해외에서 임페리얼 스타우트나 사우어 에일로 유명한 양조장에서도 라거나 페일 에일과 같은 모두를 위한 맥주를 만듭니다. 심지어 그 수준이 매우 높아 맥주 애호가들도 즐겨 찾는다고 합니다. 정빈 양조사는 음용성이 좋아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맥주, 그러면서 맥주 전문가가 보기에 결이 느껴지는 맥주, 비즈니스 회의를 하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맥주를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앞으로 공개될 라인업에는 필스너, 페일 에일, 스타우트과 같은 맥주의 교과서적인 스타일이 포함되어 있고, 잉글리쉬 다크 마일드나 고제와 같이 조금 생소한 스타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잉글리쉬 다크 마일드는 영국에서 오랫동안 만들어온 스타일인데, 적당이 호피하고, 적당히 몰티하고, 적당히 과일 풍미가 있어 그 모든 균형이 적절해 마시기 편한 스타일입니다. 고제는 고소한 맛, 짠맛, 신맛의 균형이 좋아서 무한히 마실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그 밖에 이번 시즌에서만 선보이는 스타일로 세종과 임페리얼 스타우트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스타일을 한꺼번에 공급할 수 있는 이유는 양조 시설의 규모가 작기 때문입니다. 발효조의 크기가 500리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발효조의 수가 10개가 넘습니다. 을를의 양조 시설에는 짧은 주기로 양조하여 여러 스타일의 맥주를 빠르게 공급해 보겠다는 양조상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브루어리 을를의 1층은 대중을 위한 공간
브루어리 을를의 2층은 맥주 애호가를 위한 공간

을를은 이제 막 시작했지만 그 인기는 대단합니다. 2월 초에 있었던 가오픈 행사에 80여 명의 국내 유명 맥주 애호가들이 다녀갈 정도로 벌써부터 크래프트 맥주의 성지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을를은 양조장뿐만 아니라 레스토랑과 베이커리를 겸한 대형 카페입니다. 양조장이 딸린 1층에는 다양한 음식과 함께 맥주를 판매하여 가족들과 외식하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2층은 맥주 탭과 바가 있어 유럽의 펍이 연상되는 맥주 마니아를 위한 공간입니다. 대중과 마니아가 모두 만족하는 맥주를 만들겠다는 의지처럼 공간 역시 모두를 만족할 수 있게 꾸몄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발효조의 맥주 효모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입니다. 꽃 피는 봄이 오면 펍에서 을를이 선사한 맥주 효모의 마법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염태진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맥주에세이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카카오, 브런치 아이디: @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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