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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다는 말

점심을 먹으러 한 비빔밥집에 갔다. 한 시 반까지밖에 서비스를 안 해서 부리나케 육회비빔밥을 주문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고기를 위해 가운데 놓인 숯불 판 위로 누렇게 덮여 놓은 덮개는 무슨 제대처럼 식탁보다 약간 위로 튀어 올라와 있었다. 직원분이 찬을 가져와서 그 불판 덮개 위에 얹으며 말했다. “찬 올려드리겠습니다” 올려드린다니 참 교육이 잘 된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 내어드릴게요”라고 해도 되고 “반찬 나왔습니다”라고 해도 되고 “세팅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외래어를 쓰는 집도 많은데 올린다는 표현을 쓰다니.

올린다는 말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하늘이나 곡식을 담당하는 신에게, 국가의 큰 제사나 마을 제사 등에서 마음을 바쳐 소망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신인(神人) 교감의 장면에서 나올 법한 표현이 아닌가. 고급스럽고 세련된 식당이긴 하지만 밥집이라면 밥집인 평범한 식당인데 이런 언어를 구사하도록 가르쳤다니, 외식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한 사람으로써 약간 놀라웠다. 가게 옆으로 큰 절이 있긴 하니 그것이 언어생활에 영향을 미쳤을까?

예스러운 표현을 좋아하시는 분이 많이 오시거나 주인이 그런 언어 예절에 예민하시거나 손님 중에 한 분이 가르쳐주신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식당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더 귀에 그 말이 짤랑거렸다.

올린다는 말은 제사 때 밥을 상에 올리거나 할 때 쓴다. 절에서 하는 공양도 올린다고 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올린다는 말은 건네고, 주고, 드리고, 차린다는 말의 극존칭이다. 극존칭이 뭐가 어떻다는 얘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극진하면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같이 가지런해지기 마련이다. 나를 위해 올린 음식이니 자알 먹어보자며 수저를 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귀한 음식인데 근사하게 받아먹기 전에 내가 이걸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부터 돌아보게 될 것이다.

차리는 이의 정성이 드는 이의 겸손을 부르는 것이다. 올린다는 말에는 왠지 재료를 집에 들일 때부터 만든 사람의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꼼꼼히 재료를 따져 고르고 따져 받고, 재료를 씻고 담고 조리고 볶는 모든 과정에서 상에 올릴 음식을 함부로 다루었을 리 없다는 믿음이 생긴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일이니, 사람의 관능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의 눈은 속일 수 없고 양심을 가릴 수 있어도 꺼림직한 부분이 있으면 죄책감에 시달릴 테니 말이다.

만드는 사람은 올릴 대상의 미래를 미리 그리고, 먹는 사람은 올린 사람의 과거를 맞는다. 서로가 존중하니 준비도 조심스럽고 맛을 내는 것도 막 했을 리가 없다. 그런 음식에 맛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경박하고 죄스럽다. 입을 즐겁게 하는지 보다 한 점 한 점에 어떤 울림이 있는지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올린다는 말은 그러고 보면 재료가 상에 올라 입으로 들어가고 다시 자연으로 배출되기까지 상차림의 모든 과정에 자기 마음이 들어갔다는 물 만진 이의 도장 같은 것이다. 다 보장할 수는 없지만 여기까지가 준비하는 사람이 하는 최선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형식은 보통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더 나아지고 싶고 더 존경받고 싶고 더 멋있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늘 숨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보다 나은 것을 닮아가고 그를 통해 그가 누린 멋과 여유를 자신도 누리고 싶어 한다. 올린다는 극존칭의 그 마음이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평범한 밥 한 끼를 먹으며 신을 만나고 경외를 느끼는 민족인 것이다. 그런 고유어가 살아 있어 처음의 뜻이 아직 살게 되고 그 뜻이 살아있어 밥상을 받으면서도 원형을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찬 올려드리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시간은 거슬러 흐른다. 먹거리를 올리는 일상의 밥상 위에서 우리는 잊었던 조상을 만나고 그 의미를 짚어 든다. 다시 잘해 보겠다는 새 마음을 봄나물 한 점의 쌉싸름함에 담아.

이수부
이수부
원테이블 식당에서 혼자 밥을 지으며 먹거리를 둘러싼 우리의 기억과 몸짓이 문화 안에서는 어떤 의미일지 문득 되돌아보는 일상 관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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