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백과 무르익는 천고마비의 계절. 자칫 식탐을 과하게 부렸다가 과체중으로 가기 쉬운 계절이기도 한데요. 건강하게 그러나 위에 부담은 줄이면서 입은 즐겁게, 그런 행복한 미식을 원할 때 좋은 대안으로 중동 요리만 한 게 또 있을까 싶어요. 비루한 위 주머니를 달고 태어난 필자에게는 소화도 잘되고 입맛에도 잘 맞는 요리가 바로 중동 요리. 대개는 쉬운 레시피라는 점도 큰 매력인데요. 그중에서도 쉬운 게 훔무스(아랍어로는 ḥummuṣ, 영어표기로는 hummus 혹은 houmous)이죠. 훔무스는 아랍어로 ‘병아리콩’이란 뜻. 그 훔무스의 손쉬운 홈메이드 버전을 알려 드리기에 앞서, 오늘도 요리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이 먼저입니다.
동네 슈퍼에 상비된 재료로만 보면, 아직 중동 요리는 가정의 식탁에서는 멀리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면, 상황이 반전되는 걸 느껴요. 예전에는 이태원 근방이나 가야 있던 중동 요리 식당들이 이제는 웬만큼 식당이 밀집된 지역이면 하나둘 둥지를 틀고 있곤 하니까요. 또 언제부터인가 TV 프로그램이나 잡지, SNS 같은 데서도 부쩍 자주 다루어지는 것도 같고요.
우리 전통 요리인 한식, 그리고 이 땅에 상륙한 지 오래인 중식, 일식, 또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요 몇 년 새 서울의 미식 씬에서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인 장르가 중동 요리(中東料理)가 아닐까 합니다. 정확히는 중근동(中近東) 요리라 해야 할 텐데요. 중근동이라 함은 중동과 근동의 총칭. 영어로는 ‘The Near and Middle East’인데요. 따지고 보면 유럽을 기준으로 한 지칭이죠.
어디까지나 유럽에서 보았을 때, 가장 가까운 동양을 근동(近東), 가장 먼 동양을 극동(極東), 그 중간을 중동(中東)이라 나눠본 것이고, 이 중동과 근동을 합친 말이 바로 중근동. 그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는가에 대해서는 시대 따라 나라 따라 다르지만, 보편적으로는 아프리카 북동부와 서아시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크게 보아 지중해연안국가 즉 그리스, 이집트, 튀니지 등에서 이란이나 터키, 또 인도 등에 이르기까지 꽤 넓은 지역을 아우르죠.
중근동의 범위는 너르고 너르지만, 음식에서는 꽤 동질성이 발견되곤 합니다. 중동 요리를 자주 즐기는 분이라면 잘 아실 텐데요. 이집트 식당, 파키스탄 식당, 인도 식당, 터키 식당 등등 중동 요리 식당에서 이런저런 걸 먹다 보면 유사한 향미와 풍미가 느껴질 때가 많죠. 커민(cumin), 터머릭(turmeric=강황), 아니스(anise), 시나몬(cinnamon=계피) 등과 같은 특유의 향미를 지닌 스파이스가 많이 사용되니 그러하고, 피타(pitta)와 인도의 로티(roti)나 난(nann), 터키의 괴즐레메(gozleme), 아르메니아의 라바쉬(lavash) 등등 플랫 브레드(flat bread 밀가루, 물, 소금으로 반죽해 얇고 납작하게 굽거나 튀긴 빵)도 만드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재료나 질감, 향미도 비슷하니 닮은꼴이라는 느낌을 주고요.
병아리콩을 주재료로 한 딥(dip)인 훔무스도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듯 다른 배리에이션으로 펼쳐지죠. 이스라엘의 땅에서 건국 이전부터 먹어온 역사가 있어 이스라엘 요리라 여겨지기도 하고, 이집트에서 13세기에 발간된 요리책에는 훔무스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하여 이집트가 기원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레반트 지역(Levant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그리스, 터키, 이스라엘 등을 포함한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 그중에서도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티나, 레바논 일대가 발상지로 여겨지는데요.
면역력도 높이고 항염 작용도 있는 향신료가 많이 쓰이는 등 대부분이 건강 지향적인 재료와 제법을 지닌 게 중동 요리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훔무스는 야채와 식물성 단백질을 듬뿍 섭취한다는 이점 때문에도 본향인 중동 지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또 다이어트나 건강을 의식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죠. 또, 그런 건강식 이미지 못지않게 쉽고 스피디한 레시피도 오늘날 세계 여러 도시에서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재료나 섞는 순서 등 기본 조리법이 지역마다 다소 달라지기도 하지만 훔무스의 기본 재료는 타히니(tahini =껍질 벗겨서, 볶지 않은 상태의 참깨를 곱게 갈아 만든 페이스트), 병아리콩, 마늘, 레몬즙, 소금, 커민, 올리브 오일. 이 재료들을 차례로 가는 게 다인데요. 스프레드 형태로 갈되 농도는 기호에 맞게 갈면 됩니다.
병아리콩을 넉넉한 물에 담가 최소 24시간 충분히 불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더 손쉽게 만들고 싶거나, 병아리콩을 쉽게 구할 수 없다면 캔 제품을 쓰면 간편. 타히니도 일반 참깨로 대체 가능하고요).
6~7인분일 때 기본 훔무스 재료는, 병아리콩 400g(약 1캔), 마늘 2톨, 타히니나 참깨 2큰술, 레몬즙 2큰술, 소금 1/3작은술, 커민 파우더 1/4작은술, (반드시 풍미 좋은) 엑스트라버진올리브오일 2~3큰술과 병아리콩을 삶은 물. 그리고 장식용으로 다진 이탈리안 파슬리와 파프리카 파우더 약간.
1) 충분히 불린 병아리콩을 냄비에 담고 콩이 잠길 만큼 찬물을 부은 다음, 한 벌 끓어오르면 약한 불로 줄여 최소 1시간 푹 삶아요(캔 제품 병아리콩의 경우도 캔에 든 물을 체로 걸러낸 다음, 콩을 냄비에 담아 새로 물을 붓고 30분쯤 더 삶아 주면 훨씬 부드러운 식감의 훔무스를 만들 수 있어요).
2) 삶은 병아리콩과 병아리콩 삶은 물(최소 5큰술. 기호껏 가감)을 믹서에 넣고 갈아요.
3) 으깬 마늘과 (장식용을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도 모두 더해 원하는 농도로 갈아요(이때 원하는 농도는 병아리콩 삶은 물을 가감하여 조절하면 됩니다).
4) 접시 중앙에 완성된 훔무스를 담은 뒤, 한쪽 손으로는 티스푼 끝을 훔무스 중앙에 살짝 꽂고, 또 한쪽 손으로는 접시를 둥글게 회전시키면서, 훔무스에 달팽이 형상의 홈을 만들어 줘요.
5) 이 홈에 올리브오일을 붓고, 다진 이탈리안 파슬리와 파프리카 파우더를 적당히 흩뿌리고, 병아리콩도 몇 알 올려 주면 완성! 피타에 찍어 먹거나, 올리브오일에 바삭하게 구워낸 바게트에 찍어 먹거나…
이 기본 훔무스 재료에 올리브오일에 볶은 버섯을 함께 갈아 주면 감칠맛 폭발하는 ‘버섯 훔무스’가 탄생합니다. 볶은 버섯 일부를 덜어 뒀다가 토핑에 사용하면 비주얼도 한층 먹음직스러워지고요. 그 자체로 감칠맛 덩어리인 콩과 버섯의 만남, 맛의 시너지가 충분히 상상되지 않나요? 버섯의 비율은 기호에 맞추면 되는데, 1팩이면 충분히 향미를 낼 수 있어요. 만약 뒥셀(duxelles =잘게 다진 버섯, 샬로트, 허브 등을 버터로 볶아 페이스트화한 것)이 있다면, 볶은 버섯 대신 뒥셀 1~2큰술을 병아리콩과 함께 갈아 주면 좀 더 손을 덜 수 있죠. 버섯 훔무스를 활용한 파스타도 진미인데요. 1인분 기준, 프라이팬에 버섯 훔무스 2~3큰술과 생크림 반 컵을 섞어 끓이다가, 삶은 파스타를 넣어 재빨리 볶아주면 정말 맛난 파스타가 순식간에 완성됩니다.
바질, 그리고 선 드라이 토마토(sun dried tomao =말려서 올리브유에 절인 토마토)가 있다면 눈이 휘둥그레지게 맛난 토마토 훔무스도 만들 수 있습니다. 토마토와 바질은 원래 단짝 조합인데, 여기에 고소한 감칠맛 품은 콩이 더해지니 맛날 수밖에요. 새콤, 향긋, 고소함의 조화가 정말 일품인데요. 기본 훔무스 재료에 이 두 가지를 더해 함께 갈아주면 끝. 비율은 역시 기호에 따르지만, 전술한 기본 훔무스의 분량이라면 선 드라이드 토마토는 약 60g, 생 바질은 5~6장.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변주 버전 훔무스이기도 한데요. 드셔 보시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이게 될 맛! 토마토 훔무스를 피타에 바르고 구운 닭가슴살을 샌딩 해도 참 맛나고, 피타 대신 토르티야(tortillas =옥수수로 반죽, 발효 없이 납작하고 둥글게 만든 빵)로 그렇게 만들어도 굿.
홈메이드 훔무스 마지막 버전은 화려한 색감의 ‘핑크 훔무스’. 화려함의 숨은 주역은 바로 비트인데요. 아름다운 빛깔이 시선을 확 끄는 만큼, 크래커나 길게 썬 셀러리, 당근 등과 함께 야채의 딥으로서 홈 파티 테이블에 올리면 칭찬 세례가 쏟아질 버전. 딜 등 상큼한 허브, 고소함을 한 번 더 더해 줄 해바라기씨를 토핑해 줘도 좋고요. 비율은, 상술한 기본 훔무스 재료일 때, 중간 크기 정도의 비트가 적당합니다(물론 기호껏 가감). 깨끗이 씻은 비트를 알루미늄 포일로 싸서 190도로 예열한 오븐에 1시간쯤 구워서 조금 식힌 후, 껍질을 까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 다른 재료들과 함께 갈아 주면 끝입니다. 핑크 훔무스의 가장 손쉽고 맛난 활용 예는 샐러드. 핑크 훔무스 2~3큰술에 생크림 2~3큰술을 섞어, 삶은 감자와 버무리고 그라나 파다노(grana padano) 같은 경성 치즈와 그린 올리브 등을 올린 뒤 좋아하는 빵을 곁들이면, 결코 멈출 수 없는 맛 완성!
훔무스는 본래 요리 초반에 먹는 스타터. ‘무카비라트’ 혹은 ‘메제’의 일종인데요(muqabbilāt=전채. mezze는 전채의 방언). “훔무스 없는 식사는 흡사 이야기 없는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중동 사람들의 식탁에서는 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지죠. 본향에서는 피타에 훔무스를 발라 팔라펠(falafel 병아리콩이나 잠두, 파슬리, 양파, 마늘, 커민, 고수 등을 갈아 둥글게 반죽해 튀긴 것)을 샌딩해 먹기도 하지만, 어떤 요리든 조합과 변주는 자유. 조금 넉넉히 만들어 냉장해 두고 샌드위치에 바를 페이스트로 써도 좋고, 생크림이나 우유를 부어 끓이면 풍미 좋은 수프로도 즐길 수 있고, 약간의 올리브오일이나 우유 등으로 농도를 조절하면 샐러드 드레싱으로도, 또 고기/생선요리의 소스로도 그만.
여담을 빠뜨리면 서운하죠. 중동 국가 중에는 한때 프랑스령이었던 나라가 많은 게 사실. 그러한 역사는 이주해 온 중동 사람들과 함께 파리의 먹거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를테면 팩으로 된 훔무스라든가, 간단한 끼닛거리로 애용되는 타불레(Tabbouleh 토마토, 양파, 세몰리나, 파슬리 등을 다져서 올리브유, 레몬즙, 소금을 섞은 드레싱과 섞어 먹는 중동의 샐러드) 같은 것도 슈퍼에서 사시사철 팔리고 있죠. 도심을 좀 벗어난 지역에는 유독 맛난 중동 요리 식당도 많고요. 파리 외곽의 레바논 식당, 튀니지 식당의 요리는 필자에게도 여전히 생각나는 맛. 예전에는 파리를 찾는 즐거움 중 하나가 그런 슈퍼마켓 버전 후무스나 타불레를 사 먹거나, 외곽의 허름하지만 맛난 중동 요리 식당으로 향하는 것일 때도 있었는데요(사실 그 슈퍼 버전 후무스나 타불레는 아주 맛난 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이제는 서울에도 그에 못지않은 중동 요리 식당이 참 많아졌죠. 문을 연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태원 언덕 위의 한 식당에는 스파이스의 귀재라 불려 마땅할 쉐프님이 계시는데요. 그곳의 맛난 중근동 요리 디쉬들 가운데 늘 엄지척을 부르는 것도 잘 구워진 로티와 함께 나오는 살짝 스파이시한 풍미의 훔무스.
영양가도 높고 손쉽게 만들 수 있고, 무엇보다도 너무 맛나서 꼭 권해 드리고 싶은 홈메이드 훔무스의 다양한 버전들, 이 가을 꼭 만끽해 보시기 바랍니다. 차례로 섞기만 하면 끝! 이보다 간단할 수 없어요. 게다가 활용도 갑! 이 수제 후무스 맛에 한 번 눈뜨면 다시는 문밖에서는 후무스를 찾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쉬워도 너무 쉽고 맛나도 너무 맛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