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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워크림이 가져다주는 맛있는 반전

생크림을 주재료로 한 유제품 가운데, 일상의 식탁에서 무한 활약할 맛을 지닌 것으로 사워크림(sour cream)만한 것이 또 있을까요? 그 가볍고 상쾌한 새콤함 속 우마미(UMAMI)는, 이런저런 요리에서 특유의 감칠맛으로 풍미를 배가시킬 비밀병기가 되곤 하는데요. 유럽이나 북중미, 동유럽 요리 등에서는 기본적으로 조미료로 쓰이지만, 응용 여하로 주연급이 되기도 하는 풍성한 맛을 품고 있죠.

사워크림을 곁들인 스위트 포테이토 (고구마를 삶아 버터, 설탕 등을 섞어 오븐에 구운 요리)

간단히 말하면 생크림을 유산균으로 발효시킨 것이 사워크림. 프랑스에서는 ‘크렘 에그르’(crème aigre)라고 하는데요. 사워크림의 ‘sour’나 크렘 에그르의 ‘aigre’나 모두 ‘시큼한’ 혹은 ‘신’이라는 뜻으로, 유산균에 의한 발효생성으로 시큼한 맛이 난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러니 도드라지는 특징이 순한 산미, 그리고 생크림보다 다소 걸쭉한 질감입니다.

시각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릴 사워크림이 등장하는 요리는 아마도 구운 감자에 사워크림을 올려, 다진 차이브(chive 양파와 유사한 향미와 톡 쏘는 맛을 지닌 허브)를 흩뿌려 먹는 베이크드 포테이토일 텐데요. 발효 버터의 원료로도 쓰이고, 유럽/북미 요리에서 샐러드 드레싱의 베이스나 다양한 딥의 베이스로 쓰이거나, 제과에서 케이크, 스콘, 도넛 등의 반죽에 들어가거나… 용처가 정말 많은 식재료죠.

여기저기 다양한 요리에 애용하는 사워크림 애호가인 필자의 장보기 목록에도 자주 들어가는데요. 국내에서는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덕용 급’만 팔아서 한번 사면 몇 날 며칠을 사워크림 요리 대행진을 이어가야만 했죠. 느긋하게 뒀다가는 상하고 마는 사워크림은 치즈류와는 달리 곰팡이를 걷어내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아니니까요. 온갖 요리에 동원하는 사워크림 애호가에겐 조기 소진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450g짜리가 나온 이후 더 효율적으로 요리할 수 있게 된 게 사실입니다. 아직도 가까운 마트에는 잘 보이지 않고 대형 마트에나 가야 있긴 하지만,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맛난 사워크림 활용 메뉴들이 많으니 기꺼이 원정을 떠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한 메뉴는 사워크림 당근 라페! 오리지널 버전 당근 라페도 맛나지만, 사워크림 당근 라페는 정말 간단한 공정으로 이 이상 더 맛날 수 없는, 사워크림 요리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니까요.

사워크림 당근라페 토스트

당근 2개 채 썰고 소금 솔솔 뿌려 10분 후쯤 꼭 짜요. 보울에 사워크림 70g, 올리브오일 4작은 술, 소금 1/3작은 술, 꿀 1작은 술, 커민 2/3작은 술(후추가 아닌 커민!)을 잘 섞고, 여기에 당근 섞고,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식빵, 바게트 등 기호에 맞춰)에 듬뿍 올리면 베스트 캐롯 라페 완성! 사워크림에 산미가 있으니 레몬이나 오렌지즙 등이 필요 없고, 정말 스피디하게 만들어지는 맛난 한 끼에요.

사워크림 버섯 웜 샐러드, 타임 토핑으로 마무리!
컬리플라워와 버섯을 활용한 사워크림 웜 샐러드, 삶은 계란 토핑으로 예쁜 색감과 영양 추가!

바쁘디 바쁜 현대인에게 필요한 스피디하고 맛난 사워크림 요리 하나 더! 야채 러버라면 더 환영할 웜 샐러드인데요. 컬리플라워, 버섯, 감자, 브로콜리니 등등 뭐든 좋아하는 야채면 돼요. 먼저 소금물(소금은 물의 약 0.5%)에 야채를 살짝 데쳐내요. 2인분 기준, 보울에 사워크림 2큰 술, 올리브오일 1큰 술, 소금과 후추(기호에 맞게 적량)를 믹스, 여기에 데친 야채 섞고, 접시에 담은 후 허브 흩뿌리면 끝(타임이 가장 잘 어울려요). 들어간 건 올리브오일과 사워크림 뿐이지만 야채가 지닌 UMAMI와 사워크림의 UMAMI가 일궈내는 시너지가 어마어마. 어떤 허브든 다 되지만 웜 샐러드에 더해진 사워크림에는 타임이 차이브만큼이나 기묘하게 좋은 상성이에요.

토마토 러스틱 파이

러스틱 파이 가운데 식사용으로도 그만인 토마토 파이는 사워크림이 더해지면 이름 그대로 소박(rustic)하면서도 풍성한 맛으로 대변신. 더운 날이 다가오면 많이 찾게 될 콜드 수프에서도 사워크림은 맛을 증폭시킵니다. 특히 단맛 깃든 망고 수프나 새콤달콤한 살구 콩피튀르를 올린 고소한 차요테 수프 등에는, 생크림과 사워크림을 반반 섞어 올려 주면 한결 부드러운 산미가 달달함 또는 고소함과 대비를 이루면서 상큼한 맛의 상승작용이 일어나요.

사워크림을 곁들인 망고 콜드 스프
살구 콩피튀르를 토핑한 차요테 콜드 수프

사워크림의 스펙트럼은 의외로 광활합니다. 닭고기와 감자로 만든 스튜와 비슷한 콜롬비아 요리 ‘아히아꼬’(Ajiaco)에 올려지기도 하고, 붉은 순무로 만드는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의 수프 ‘보르쉬’(borsch)에 토핑되기도 하고, 러시아 향토 요리 ‘비프 스트로가노프’(beef stroganov)에 더해지는 스메타나(smetana)도 러시아식 사워크림이죠.

또, 헝가리의 명물 팔라친타(palacsinta 햄이나 치즈, 과일잼이나 초콜릿 등등 다양한 재료를 샌딩해 먹는 크레페와 닮은 헝가리 고유의 팬케이크 요리)에도 쓰이고, 멕시코풍 미국 요리와 텍사스 향토 요리를 가리키는 ‘텍스멕스 퀴진’(Tex-Mex cuisine)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사워크림.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사워크림의 발상지는 20세기 전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지라고도 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요리에 유독 사워크림과 유사한 것이 많아 주변국 전통요리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건데요. 단, 당시에는 유산균 발효가 아니라 생크림을 방치한 결과 발효되고 신맛이 생겨났던 것인데, 이를 ‘사워크림’이라고 부르게 된 것.

또, 16세기 무렵 러시아인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초는 몽골. 말젖으로 만든 발효유이자 ‘저알코올 음료’인 몽골의 마유주(馬乳酒), 즉 쿠미스(kumyz)가 그 원형이고, 매우 산미가 강한 게 특징인데, 현재도 러시아는 물론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음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경제 상황이 매우 빈곤한 상태였던 90년대 러시아에서는 식량부족도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사워크림은 마요네즈와 함께 아이들의 영양 보충용 ‘슈퍼푸드’로 각광받은 이력도 있습니다. 단지 수프나 야채 등에 심플하게 곁들여 먹는 게 다였지만, 맛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시각적으로도 화려해지니 가정의 식탁에서 대활약했다는 후문.

사워크림 소비 대국으로 미국,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 독일 등이 꼽히는데 연간 260만 톤이 소비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조리도 손쉽고 영양도 풍부하다는 반증이겠죠. 사워크림이 국민식이라 해도 좋을 동유럽, 북유럽 등에서는 수프에 흔하게 올려지는데요. 국내에도 적당한 용량의 제품도 나올 만큼 소비층이 두터워지고 있죠. 물만두에 올려 먹어도(기왕이면 차이브나 송송 썬 쪽파도 올려서..) 얼마나 맛난지 몰라요. 만능 조미료라 불러 마땅할 사워크림! 장보기 목록에 꼭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by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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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자란 디저트 애호가 이야기야말로 맛을 배가시킬 가장 빛나는 재료라 믿는 사람 네 가지 직업을 거쳐 현재 이야기꾼이자 디저트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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