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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하철 1호선 펍 크롤링

: 금요일 오후에 떠나 만 24시간 동안의 맥주 여행

자체 조사에 의하면, 부산에는 8개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과 20여 개 이상의 크래프트 맥주 펍이 있습니다. 부산으로 1박 2일간의 펍 크롤링 여행을 계획했을 때, 이중 갈 수 있는 만큼의 펍을 선정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부산 크래프트 맥주 펍을 교통편이 비슷한 지역으로 묶어 보고, 그중 하나의 지역만을 집중적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광안리 구역, 해운대 구역, 지하철 1호선 구역, 그 밖의 구역으로 된 4개의 권역이 나왔습니다.

– 광안리 구역 : 광안리는 갈매기 브루잉의 본점이 있는 곳으로, 허거스, 쥬든, 솔탭하우스, 아울앤푸시킨 등 개성 있는 크래프트 맥주 펍들이 즐비합니다.

– 해운대 구역 : 유명세와 크기에 비해 의외로 크래프트 맥주 펍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산의 대표적인 브루어리 두 곳이 이곳에 있습니다. 고릴라 브루잉 해운대점과 고릴라비치, 그리고 갈매기 브루잉 해운대점입니다.

– 지하철 1호선 구역 : 하나의 지역으로 한정 지을 순 없지만, 같은 교통편으로 갈 수 있는 지역입니다.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서면역에 와일드캣 브루잉, 비어샵, 프리츠프리츠, 캐빈보이, 솔탭하우스가 있습니다. 북부에는 온천장역과 부산대역에 각각 허심청 브로이와 컬러드가 있고, 남부로 내려오면 중앙역에 마이행아웃, 자갈치역에 갈매기 브루잉 남포점이 있습니다. 남포역에서 내려 영도로 들어가면 사우어영도와 윈지까지 모두 1호선 권역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 그 밖의 구역 : 기장에 와일드웨이브 본점과 부산 프라이드 브루어리, 동래에는 이름이 특이한 ㅎㅎㅎ 펍과 꼽표XXX, 송정에는 독일 맥주로 유명한 툼브로이, 경성대에는 갈매기브루잉 경성대점과 무인 바틀샵 오피(offy), 수영에 프라하993 브루어리가 있습니다.

이 중 지하철 1호선 구역에서 1박 2일 동안 즐길 수 있는 펍 다섯 개를 선정하여 떠났습니다. 금요일 오후에 시작하여 토요일 오후까지 만 24간 동안의 맥주 여행입니다. 1호선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하는 경로를 잡았습니다. 부산 맥주 여행, 함께 떠나보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컬러를 가지고 있다. 당신 인생의 맥주 컬러 <컬러드>]
부산역에 도착한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 컬러드가 문을 여는 시간은 5시. 컬러드는 부산대역에 있지만, 일부러 온천장역에서 내렸습니다. 천천히 걸으며 부산을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927년의 전차가 달렸던 풍경을 아름답게 꾸며 놓은 거리를 걷고 허심청 브로이를 지나치니 맥주 여행에 생동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언덕이 많은 동네의 지형이나 구불구불한 옛길, 자유분방하게 뻗어 있는 교차로까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온천장역 1927 전차거리

컬러드는 부산대 대학가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공간입니다. 자유롭게 배치된 테이블이 대여섯 개, 스크린 앞의 기다란 바에 여섯 개 정도의 좌석이 있습니다. 그중 혼자 있기 가장 좋다는 스크린 앞에 앉았습니다. 스크린에서는 서울의 길거리를 실시간처럼 보여주고 있었는데, 여행 기분을 지속적으로 느끼며 맥주를 마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상이었습니다.

컬러드 외관

컬러드의 맥주 리스트를 살펴봅니다. 컬러드는 작게나마 자체 양조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만든 검은색의 고도수 맥주는 맛이 뛰어납니다. 고도수 맥주로 15.5%의 발리와인과 임페리얼 스타우트 Kids Return과 Q.E.D가 보입니다. 그밖에 게스트 맥주로 와일드웨이브가 일부 보이고, 수입 맥주가 세 종류 보입니다.

컬러드 탭들

검은색 맥주를 제치고 장전에일 스핀오프가 눈에 띄었습니다. 장전에일의 어떤 설정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혔는지 궁금해 스핀오프와 오리지널을 함께 시켰습니다. 원래 장전에일은 차를 마시듯 가볍게 마시기 좋은 맥주이지만, 너무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장전에일 스핀오프는 확실히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스핀오프는 장전에일을 와인 배럴에 숙성한 맥주인데, 코끝에서 베리와 와인 향이 느껴지고 목 넘김에선 나무 향이 납니다. 색도 진해졌고 진해진 색만큼 바디감도 묵직해졌습니다. 보통 배럴 숙성을 사우어 계열이나 고도수 맥주에 하는데, 3.8%도로 가볍게 소비되는 이런 장르의 맥주에 적용하니 특이하긴 합니다. 그밖에 가장 최근에 생산된 호밀 라거를 한 잔 더 마시고, 바텐더가 ‘앰바고’라면서 건넨 맥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이제 공개할 수 있겠네요. 그 맥주는 둔켈 스타일로 ‘이것은흑맥주가아니다’였습니다.

장전에일 스핀오프와 장전에일 오리지널

[이거 먹으면 뉴욕 가는 거다 <비어샵>]
비어샵에 가려면 부산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서면역에서 내려 1km 정도 걸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비어샵에 간 이유는 미국 스타일의 맥주와 파스트라미 버거를 먹으며 뉴욕을 상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서면역에서 비어샵에 가려면 큰길을 따라 걸어도 좋고, 길 찾기에 자신이 있다면 서면의 뒷골목에 15분 정도의 시간을 내주어도 좋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금요일 저녁의 비어샵 앞에서는 호흡부터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공간을 방황하던 다국적 목소리들이 이때다 싶어 덤벼들었습니다. 마치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뺀 것처럼 한꺼번에 몰려들었습니다.

비어샵 외관

비어샵은 내부의 공간과 외부의 공간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내부의 공간에는 예닐곱 개의 테이블과 창을 바라보는 자리가 있고, 외부의 공간은 하늘이 뚫려 있습니다. 내부 공간에는 빈 좌석이 거의 없었고, 외부 공간도 3월 초의 밤공기가 쌀쌀했음에도 많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비어샵의 외부 공간

비어샵의 맥주는 대략 10종류의 드래프트 맥주와 냉장고에 보관된 수많은 캔과 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드래프트 맥주는 매주 바뀌기 때문에 항상 신선합니다. 맥주 냉장고를 보니 이래서 이름이 비어샵(Beershop)이구나 싶었습니다. 쇼핑하듯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다 마시면 됩니다. 맥주는 수입 맥주도 더러 보이지만 대부분 국내 크래프트 맥주입니다. 고릴라 브루잉, 맥파이 브루잉, 칠홉스 브루잉, 미스터리 브루잉, 크래프트 브로스 등이 눈에 띕니다.

비어샵의 맥주 쇼핑

그중 크래프트 브로스의 시티오브더블을 꺼냅니다. 파스트라미와 어울릴만한 맥주가 필요했습니다. 파스트라미는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입니다. 어쩌면 맥주보다 더 인기 있는 이곳의 대표 메뉴입니다. 파스트라미(Pastrami)는 향신료로 양념한 고기가 들어간 버거를 말하는데, 고기 패티 4장이 들어간 비어샵의 파스트라미를 한입 베어 물고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맥주를 마시니 이곳이 바로 뉴욕이 되었습니다.

파스트라미 버거와 시티오블더블 뉴잉글랜드 IPA

[숨어 있기 좋은 방. <프리츠프리츠>]
모든 속세와 인연을 끊고 맥주에만 집중해 보고 싶으면 프리츠프리츠에 가보세요. 고백하자면, 저는 이미 꽤 취한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술을 주제로 하는 취재는 이런 게 항상 문제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몸은 축나고 기억력은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뒷골목을 따라 걸으니 빨간 벽돌집 2층에 프리츠프리츠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수많은 맥주 통과 출입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맥주 스티커들이 반깁니다. 과연 이곳이 맥주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인가 싶습니다.

프리츠프리츠의 외부
프리츠프리츠에 올라가는 계단

프리츠프리츠는 맥주로 된 아지트입니다. 왠지 뜻이 맞는 동지들을 불러 모아 무언가 모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학교 때 읽은 신이현 작가의 <숨어 있기 좋은 방>이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너무 오래 세월이 지나 소설의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제목만큼은 프리츠프리츠에 붙여주고 싶습니다. 혼자이든 여럿이든 숨어서 맥주 마시기 딱 좋은 방이라고.

프리츠프리츠의 맥주 냉장고
프리츠프리츠의 내부

프리츠프리츠는 주로 수입 맥주를 취급합니다. 탭 맥주도 병 맥주도 캔 맥주도 대부분 수입 맥주입니다.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부터 최신 경향의 트렌디 맥주까지. 그중 노스 코스트 브루잉의 올드스탁과 토플링 골리앗 브루잉의 사이버 수를 골랐습니다. 이 정도면 스테디셀러와 트렌디로 제법 잘 고른 셈이지요?

[완벽한 맥주에 필요한 완벽한 뷰. <사우어영도>]
사우어영도는 크래프트 맥주 펍이면서 홀륭한 레스토랑이기 때문에 다음 날 점심 일정으로 선택했습니다. 참고로 사우어영도는 와일드 웨이브가 직접 운영하는 레스토랑 겸 펍입니다.

사우어영도는 영도에서 부산대교의 진입로인 봉래동에 있습니다. 영세한 조선소와 창고들, 정돈되지 않은 부둣가의 풍경을 가진 동네에 유독 세련된 건물 하나. 그 8층 건물의 꼭대기에 사우어영도가 있습니다. 근데 동네 이름이 봉래동이라고? 문득 동네의 이름이 익숙해서 그 유래를 찾아봤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산 봉래산처럼 이곳 영도에도 봉래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봉래산은 원래 신선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유명한 산인데, 그래서인지 이곳 영도에는 신선동도 있고, 영선동도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부산대교에서 바라본 항구의 모습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우어영도에 들어섭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매장으로 이어집니다. 경계 같은 건 없습니다. 크고 넓은 홀과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통창들이 모두 하나의 공간입니다. 이 넓은 공간에 이렇게 테이블을 적게 써도 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우어영도 입구

하나의 큼직한 테이블에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좌석이 마음에 들었지만 혼자 있기에 좋은 바에 앉았습니다. 혼자 이렇게 넓은 공간과 너른 시야, 확 트인 경관을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져도 되는지, 공간을 가진 부자가 되어 순간 너무 행복했습니다.

사우어영도 내부

맥주는 설레임으로 주문해 봅니다. 설레임은 말해 뭘 하겠습니까. 4년 연속 대한민국 주류대상을 받은 맥주라는데. 과일이나 부가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았음에도 상큼한 과일 맛이 나는 맥주, 발효 단계에서 홉을 추가로 넣는 드라이홉핑과 유산균 발효 덕분으로 레몬처럼 시큼하고 열대 과일처럼 상큼한 맛이 나는 맥주입니다. 블랙타이거 새우가 들어간 리조뜨와 설레임을 같이 마시면서 부산대교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곳을 영영 뜨기 싫어졌습니다.

맥주 설레임과 바에서 바라본 풍경

[나의 인생에 맥주 단골집 하나. <마이행아웃>]
이제 부산 1호선 펍 크롤링의 마지막 펍을 찾을 때입니다. 사우어영도에서 부산대교를 건너 중앙역까지 걸어갔습니다. 이곳에는 오픈한지 10개월 정도 되어 이제 슬슬 입소문을 타고 있는 펍, 마이행아웃이 있습니다.

마이행아웃 외관

대표의 경력이 특이합니다. 롯데자이언츠에서 통역을 하다가 맥주가 좋아서 펍을 차린 경우인데요. 그동안 갈매기 브루잉과 와일드 웨이브에서 펍 경험을 쌓았고, 24년에 본인의 펍을 차린 것입니다.

혹시 행아웃을 다른 뜻으로 착각하고 있나요? 행아웃은 단골집이라는 뜻인데, 많은 분들이 ‘숙취’라는 뜻의 행오버와 착각한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맛이 갈 때까지 마시라는 뜻인가? 마치 섬망(Delirium)이라는 무시무시한 뜻을 가진 맥주처럼요.

마이행아웃 외관

마이행아웃이 있는 거리는 단정하게 보도블록을 깔아 걷기 좋은 길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부산 중앙동 가로수길입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는 영화에 나온 44계단이 이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광지에 비해 평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닙니다. 평일에는 주로 직장인들이 찾아와 맥주를 마시는데, 그래서 펍이 추구하는 맥주의 경향을 주변의 상권과 맞췄습니다. 휴일에는 단골손님이 찾아오거나 외국인 관광객이 지나가다 들어오기도 합니다. 실제, 제가 밖을 보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여러 번 마주쳤습니다.

부산 중앙동의 44계단

펍에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메뉴판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수많은 맥주 중에서 선택된 맥주들이 무엇인지, 수입 맥주와 국내 크래프트 맥주 중 어느 것이 많은지, 펍은 어떤 스타일의 맥주를 선호하는지. 그리고 맥주마다의 풍미들을 읽어 봅니다. 마이행아웃은 항상 10개의 탭을 신선하게 유지합니다. 병과 캔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주로 라거 계열이나 몰트 풍미가 있는 맥주, IPA라도 가벼운 스타일로 채우는데, 이러한 성향의 맥주가 이곳의 상권과 맞습니다. 10개의 탭 중에 1~4번까지의 탭은 주로 라거로 채웁니다. 5~6번은 몰트 풍미가 강한 맥주로 채우고, 8, 9번은 IPA 계열로 채운다고 합니다. 7번과 10번은 스페셜 게스트 맥주입니다. 맥주가 바뀔 수는 있어도 이러한 경향은 유지됩니다. 제가 갔을 때 국내 크래프트 맥주로 소셜드링커스, 끽비어, 펀더멘탈 브루잉, 툼브로이, 갈매기 브루잉의 맥주가 있었습니다.

마이행아웃의 브랜딩 이미지

보통 브루어리 밖에서는 마시기 힘든 펀더멘탈 브루잉의 맥주가 있어서 첫 잔으로 선택했습니다. 스타일은 세션 IPA인데요. ‘세션’이라는 뜻의 덕목이 잘 느껴지는 가볍고 청량하면서 향이 풍부한 IPA였습니다. 두 번째 잔은 끽비어의 오프셋을 선택했습니다. 몰티한 맥주가 당겼거든요. 맛은 앰버 에일로 차분히 시작해서 입안에서 한번 미끄덩거리더니 목넘길 때 IPA로 변속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맛이었습니다.

마이행아웃은 미국의 어느 한적한 동네에 있는 펍의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마이행아웃은 저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만큼 여유로운 오후를 선물했습니다. 다음에는 이곳에 묵으면서 현지인이 되어 맥주가 있는 밤을 즐겨 보고 싶습니다. 마이행아웃 2층에는 코지한 느낌의 숙소가 있거든요.

염태진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맥주에세이 저자 /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 카카오, 브런치 아이디: @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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