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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칼럼] 담담한 뜨거움 – 김대천 셰프의 비움

이토록 뜨거운, 한식

바야흐로 한식의 황금기다. 구글이 발표한 ‘올해의 검색어’ 레시피 부문에서 ‘비빔밥(Bibimbap)’이 글로벌 1위를 했다거나 뉴욕타임즈에서 선정한 ‘뉴욕의 최고 요리 8선’에 ‘돼지 곰탕’이 선정됐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던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단순히 K-컬처를 통해 알려진 특정 메뉴나 특정 식품군에만 이목이 집중되는 게 아니라 ‘한식’ 그 전반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이 뜨겁다. 농수산식품 해외 수출은 이미 100억 달러를 거뜬히 돌파했고, 세계 각국의 식품산업 컨설팅 기업들이 연달아 ‘글로벌 식음료 트렌드’로 ‘한식’을 언급하고 있으며, ‘NRA(National Restaurant Association)’도 ‘2025 The Top 10 Trend’에서 K퀴진을 최상위권에 선정했을 정도다. 그리고 최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등재되기도 했다.

세계 미식 무대의 중심에 우뚝 서다

전 세계 미식 트렌드를 이끄는 뉴욕에서도 단연 ‘한식’이 화두다. 한 시간 이상 줄 서야 먹을 수 있다는 <동남사거리 원조 기사식당>, <옥동식> 등의 캐주얼다이닝부터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수십 개의 한식 기반 파인다이닝까지, 컨셉과 장르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프렌치다이닝의 아성을 위협할 만큼 위상 또한 높아졌다. (뉴욕타임즈, 피터웰스 칼럼 참고) ‘2025 미쉐린 가이드 뉴욕’에서 3스타 레스토랑 <정식 뉴욕>을 필두로 무려 11개의 한식 기반 레스토랑들이 스타 레스토랑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데다,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W50BR)’, ‘라 리스트(La Liste)’에 이어 ‘제임스 비어드 어워즈(James Beard Awards)’까지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을 정도다.

* 뉴욕의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중 한국 레스토랑 11개 :
정식 뉴욕(3스타), 아토믹스(2스타), 꼬치, 꽃, 마리, 메주, 봄, 오이지 미, 주아, 녹수, 주옥(1스타).

한식의 지속가능성

이 뜨거운 열기 속에 미쉐린 스타 셰프들의 새로운 한식 기반 파인다이닝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양상은, 전통적인 한식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소개하며 한식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퀸즈에 오픈한 김훈이 셰프의 <메주>와 <반찬가게>, 서울에 오픈한 김대천 셰프의 <비움> 등이 그 예다.

김대천 셰프의 <비움>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이자 2024년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Asia’s 50 Best Restaurants/A50BR) 18위인 <세븐스도어>와 <톡톡>, <텐지몽>을 동시에 이끄는 디씨크리에이티브의 김대천 셰프가 새롭게 선보이는 한식 정찬 레스토랑. 2024년 12월, 서울 청담동에 오픈했다. 진관사를 오가며 연구한 사찰음식과 ‘천 년 전 한국의 집밥’을 바탕으로, 전통 한옥의 감수성을 담은 공간에서 오신채(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조차 사용하지 않는 단아한 비건(Vegan) 한식을 선보인다.

<비움>에 들어서기 전, 가장 먼저 만나는 장독대. 직접 담근 장류, 장아찌, 전통주 등이 담겨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통 한옥의 섬세한 운율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뼘 정도밖에 작업할 수 없는 황토벽, 본드뿐 아니라 못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한 켜 한 켜 정성스레 짜맞춘 목재, 곱게 바른 한지, 단정한 문고리와 경첩, 세월의 흐름을 담은 대들보, 그리고 은은한 나무의 향과 부드럽고 따스한 조도까지. 김대균 건축가의 시간과 철학이 오롯이 담긴 이 공감각적인 공간은 착착건축사무소 작품이다.

여기에 김윤진 작가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Enameling Copper Object’ 시리즈와 이기조 작가의 청순한 백자, 스탠다드에이의 담백한 가구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니, 말간 여백이 아름다운 ‘비움’의 미학이 공간 전체를 빈틈없이 꽈악 채우고 있는 느낌이 든다.

전통적인 현대. 비움으로 채움. 이 매력적인 서사가 어떻게 요리로 이어질까.

<비움>의 런치코스와 주류 페어링

런치코스 1. 초조반

죽 / 계절에 어울리는 곡물죽 :
송이버섯과 표고버섯을 진하게 우려낸 육수와 찹쌀로 만든 따스한 죽. 쌀알이 푹 무르지 않고 식감이 제법 살아있다. 전통적이면서도 젊다.

절임 / 24절기에 맞춰 한국 전통 방식으로 만든 채소 절임 :
무, 매실, 호박 장아찌. 특히 5년 숙성한 누룩을 이용해 발효한 무장아찌의 시원한 감칠맛이 일품.

단자 / 계절 별로 간결하게 만든 작은 떡 :
쑥개떡. 은은한 쑥 향과 과하지 않은 찰기가 어우러져 단정하고 담백하다.

* 초조반(初朝飯) :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새벽 첫 식사로 죽, 미음, 응이 등과 함께 마른 찬을 먹었고, 이를 아침 식사인 조반보다 앞서는 초조반이라 칭했다.

주류 페어링 1. Krug Grande Cuvée 172ème Édition

런치 1에 곁들인 주류 페어링의 첫 번째 와인, 크룩 그랑 뀌베 172 에디션. 피노누아 44%, 샤도네이 36%, 뫼니에 20% 구성으로, 2016 빈티지가 메인 베이스이며, 1998 빈티지를 포함한 열한 개 빈티지의 146가지 베이스 와인이 블렌딩 되어 있다. 잘 익은 레몬, 라임, 감귤류 등의 시트러스 아로마를 필두로, 활짝 핀 꽃다발과 진저브레드, 견과류, 브리오슈와 누가, 꿀의 풍미가 이어진다. 산도가 높은 편이어서 초조반의 새콤한 장아찌와도 잘 어울린다.

런치코스 2-1. 연잎밥과 동치미

연잎밥은 은은하고 구수하면서도, 요즘 트렌드에 맞게 수분감이 많지 않고 쌀알의 식감이 살아있다.

홍갓으로 고운 분홍빛을 낸 동치미는 젓갈과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아 시원하고 깔끔하면서도 누룩을 사용해 풍미가 깊다. 절묘하게 잘 익혀 산미 또한 몹시 매력적이다.

런치코스 2-2. 반상 차림

춘하추동(春夏秋冬)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기운을 담은 한국 전통 반상 차림.

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지(地)-수(水)-화(火)-풍(風) 순서이며, 땅을 주제로 한 ‘지(地)’는 건호박 나물•생고사리•울릉도 눈개승마, 물 주제로 한 ‘수(水)’는 꽃시래기두부무침•고추장을 곁들인 쇠미역•고추장아찌, 불로 조리한 화(火)는 채식군만두•비장탄으로 숯불 향을 입힌 표고버섯•버섯전, 사계절을 아우르는 풍(風)은 도라지무침•연근조림•오신채와 젓갈을 넣지 않은 배추김치 구성이다.

눈으로만 보면 전통 한식 상차림을 답습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 음미해 보면 옛 선인들의 레퍼런스를 단순히 차용한 게 아니라 현시대의 대중들을 위해 친절한 방식으로 재해석한 부분들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렌드에 맞게 짠맛이나 단맛을 선명하게 살리기도 하고, 소박한 정겨움이 느껴지도록 만두를 종지 한가득 푸짐하게 꽉 채워 담기도 하고, 만두소에 대중 음식을 표방하는 당면을 넣기도 하고.

한식의 정통성과 현대적인 트렌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느낌이랄까.

주류 페어링 2. 수제 막걸리

<비움>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 물, 누룩, 찹쌀로 만든 삼양주다. 잔을 들어 올리면 복숭아, 자두 등의 핵과류와 잘 익은 망고, 파인애플 등의 열대과일 향이 진동하고,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농밀하고 진득한 질감이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은은한 산미와 쌀의 단맛이 그 뒤를 따른다. 지(地)의 나물류뿐 아니라 수(水)의 해초류와 고추장아찌, 화(火)의 기름진 군만두, 버섯전과도 두루두루 어울린다.

런치코스 3-1. 두부 지짐

김대천 셰프가 수년 전 조선시대 후기 조포사였던 진관사의 절밥을 먹고 그 맛에 반해서, 사찰 요리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두부를 별다른 양념 없이 들기름에 곱게 지져 내니 자연의 풍미가 그대로 담겨 있다.

* 조포사(造泡寺) : 만들다 조(造), 두부 포(泡). 국가 제사에 사용하는 두부를 맡아 만들던 사찰을 뜻한다. 두부를 포함한 여러 제수 물품을 공급했으나, 두부가 귀했던 시절이라 상징적으로 포(泡)를 이름에 넣었다고. 서울 진관사, 봉은사, 봉국사, 흥천사와 여주 신륵사 등 총 35개 사찰이 조포사였다.

런치코스 3-2. 더덕구이

직접 담근 고추장으로 양념해 직화로 구운 더덕구이. 색감은 강렬하지만 맵지 않고, 단맛이 살아 있다.

주류 페어링 3. 수제 청주

<비움>에서 직접 담근 청주. 유질감과 허브 뉘앙스가 기름을 사용한 채소, 곡물류 찬과 잘 어울린다.

런치코스 4-1. 추가 찬 세 가지

바삭하고 고소한 건파래 자반, 단맛이 또렷한 겨자냉채, 싱그러운 봄동 무침.

런치코스 4-2. 잡곡밥과 아욱된장국

식감이 살아있는 잡곡밥과 감칠맛이 폭발하는 된장국. 표고버섯, 능이버섯, 송이버섯을 진하게 우려낸 육수와 쌀뜨물,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여낸 된장국인데도, 고기나 해산물, 조미료를 사용한 된장국보다 풍미가 더 진하다.

런치코스 5. 차와 다과

차 / 제주 유기농 우전차. 곡우(穀雨) 이전의 어린 첫 잎을 따서 가공한 차를 우전(雨前)차라 하며, 이는 최상급 차에 속한다. 고대현 지배인이 테이블 앞에 서서 다기들을 데우고, 세차를 하고, 개완에서 우리고, 숙우에서 온도를 맞춘 후 정성스레 잔에 따르는 일련의 모습 속에 전통 다도 예법의 품격이 담겨있다. 첫 번째 잔은 향과 색을 온전히 즐기기 좋도록 은은하게, 두 번째 잔은 다과와 함께 즐기기 좋도록 진하게.

다과 / 12시부터 시계 방향으로, 모약과, 잣과 생강으로 만든 다식, 도라지정과, 곶감 단지, 대추로 속을 채운 설기떡, 딸기와 포도. 절제된 단맛이 은은하고 자연스러우며, 하나하나 놀랍도록 완성도가 높다.

* 곡우 : 곡식 곡(穀), 비 우(雨). 24절기 중 여섯 번째 절기로,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양력으로 4월 20일경이다.

주류 페어링 4. 하귤주

다과를 하나씩 먹을 때마다 중간중간 입안을 씻어주는 역할. 달지 않고 하귤의 산미가 향긋하다.

‘사찰음식에서 영감을 받아, 자극적인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은 채식 기반의 평온한 한식 정찬을 선보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었을 때는 단순히 ‘고급스러운 사찰음식 전문점이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발효, 숙성 분야에서 내공이 깊은 김대천 셰프가 아니던가. 그가 수년 동안 천 년 역사의 한국 사찰 음식을 연구하고, 제주도·울릉도·지리산 등 전국 각지의 제철 식재료를 직접 공수하고, 김대균 건축가와 함께 전통 한옥의 감수성에 ‘비움’의 미학과 스토리텔링을 담고, 고대현 지배인과 함께 오로지 <비움>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제 전통주들을 페어링으로 내며, ‘아는 사람은 아는’ 한 끗 차이를 만들었다.

마치 “밀(密)보다는 소(疎), 농(濃)보다는 담(淡)을 추구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는 평가를 받는 조선시대 문인화가 이인상의 담담한 수묵화처럼, 화려함도 기교도 다 벗어 던진 이 담담한 ‘비움’이 전 세계 미식인들에게 얼마나 뜨겁게 다가갈지.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곳이다.

[주변 문화공간]
•하이트컬렉션 (인스타그램 @hitecollection)
•글래드스톤 (인스타그램 @gladstone.gallery)
•G갤러리 (인스타그램 @ggallery.kr)
•엘리제레갤러리 (인스타그램 @eligeregallery)
•탕컨템포러리아트 (인스타그램 @tangcontemporaryartseoul)
•이유진갤러리 (인스타그램 @leeeugean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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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과 미술,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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