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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날려줄 상큼한 별미, 사워 체리 수프

유럽의 도시를 돌다 보면, 여기서 먹은 게 저기서 나오는 거 같고 저기서 먹은 게 여기서 나오는 거 같을 때가 있죠. 물론 모두 엄연히 다른 요리요 고유의 조리법을 지닌 전통 요리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뿌리가 하나인 거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중동 요리나 동남아시아 요리가 그런 것처럼, 기후 풍토 등이 비슷하면 엇비슷한 향신채소나 허브 등 공통 요소가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마치 아름드리나무에서 수많은 가지가 뻗어나간 것 같은 양상이 되는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여러 도시에서 만나는 포타주(potage) 또한 그리 느껴지곤 합니다.

본래 포타주 하면 프랑스 요리에서 수프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죠. 대체로 콩소메(consommé)같은 맑은 수프에 반해 짙은 농도와 걸쭉한 질감의 퓌레 수프를 지칭하기도 하는데요. 거장 쉐프이자 현대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Georges Auguste Escoffier)도 코스요리에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게 포타주. 코스 시작점에서 식욕을 돋울 중책을 맡았으니 이의를 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꼭 코스가 아니어도, 철철이 제철 재료로 다양한 맛을 낼 수 있고 뜨거워도 차가워도 맛나고 조리마저 간단하니 이모저모 요긴한 것이 포타주. 후덥지근한 여름날에 차가운 포타주 한 접시는 오아시스의 찬물 한 모금 같은 요리인데요.

달콤새콤하고 차디찬 핑크빛 포타주도 그중 하나. 상큼한 가운데 깊은 풍미가 있는 핑크 포타주의 다른 이름은 ‘사워 체리 수프’(Sour Cherry Soup). 헝가리안의 소울푸드입니다. 헝가리어로는 메질레베시(Meggyleves =meggy는 타트체리 혹은 신양앵두, leves는 수프라는 뜻). 질감이 포타주와 닮았으되 이름에서 드러나듯 전형적인 포타주와는 좀 다른 재료 구성이에요. 동서양의 오묘한 조화가 느껴지기도 하는 사워크림과 체리와 스파이스의 삼중주…

사워 체리 / 사진 출처: edibleeastend.com

헝가리 가정의 뜰에 가장 흔히 보이는 나무가 사워 체리 나무(신양 벚나무). 열매가 열리면 집집이 고유의 레시피로 만들어 점심이나 저녁의 전채로 혹은 후식으로 먹는 일상의 요리입니다. 미각을 자극하는 과일의 산미와 단맛이 고기 요리나 코스요리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기도 하고, 입안을 상큼하게 마무리해 주는 디저트가 되기도 하는 것이죠. 사워크림을 생크림으로 대체하기도 하고, 수프에 생크림이나 사워크림을 올리거나, 먹기 직전에 드라이 레드 와인이나 스위트 화이트 와인을 섞거나, 또 미지근한 상태로 아기들에게 이유식으로 먹이기도 하는데요. 뭐니 뭐니 해도 차디차게 먹는 그 맛이 일품.

먼저 체리를 사야 할 텐데요. 동네 마트에서도 파니 기왕이면 신선한 체리를 사서 콩포트 후 쓰면 가장 좋은데, 헝가리인도 종종 그러는 것처럼 손쉽게 만들고자 한다면 캔에 든 제품을 써도 되긴 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콩포트 체리만 있다면 5분도 안 걸릴 그지없이 쉬운 요리.

콩포트 체리를 직접 만든다면→먼저 깨끗이 씻은 체리의 씨를(본향에서는 씨까지 통째로 쓰지만) 빼 둬요(체리는 2인분 기준 200~300g), 냄비에 레드와인 200g+설탕(최소 40g) 담아 끓으면 체리 넣어 한 벌 끓어오를 때 약한 불로 바꿔 뚜껑 닫고 5~10분 졸여요(산미 있는 과일을 콩포트 시에는 가급적 법랑 냄비 사용이 위생적). 콩포트만 끝내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냄비에 콩포트 한 체리, 클로브와 카다멈 각각 3~4알, 시나몬 1대, 팔각 1~2알, 설탕 30~40g(기호 따라 가감), 물(로제와인이나 화이트와인도 좋아요.) 250cc 넣고 중불에 한 벌 끓이고, 약불에 10분 끓여요.
끓이는 동안, 보울에 옥수수전분 1작은 술과 생크림 110g을 휘퍼로 섞고, 여기에 사워크림 100g(기호 따라 가감)도 잘 섞어 줘요.
여기에 체리 콩포트 액을(체로 걸러 스파이스는 제거) 조금씩 부어가며 섞어요.

수프를 접시에 담고 걸러 놓았던 체리 올리면 끝! (이대로 따뜻하게 먹어도 맛나지만 여름에는 냉장했다 차디차게 먹는 게 훨씬 맛나죠. 생크림 휩해서 혹은 휩한 생크림과 사워크림을 섞어 한 스푼 올려도 맛나고요.)

전 세계에 무려 1,000종류 이상의 품종이 재배되고 있는 체리를 크게 나누면 세 가지. 과일 그 자체로 많이 먹는 스위트체리(sweet cherry), 생식하기에는 단맛이 부족해서 시럽, 잼, 과자나 요리에 쓰이는 사워 체리, 산미가 강하고 가끔 떫은맛이 심한 것도 있어 지비에요리(gibier요리=사슴, 비둘기 등 수렵한 동물로 만드는 프랑스요리) 등에 많이 쓰이는 와일드 체리(wild cherry) 등이 있는데요. 와일드 체리는 비누나 바디케어 제품 등의 원료로도 종종 쓰이는데, 신맛이 강해 생식이 어려운 사워 체리는 이런저런 재료와 만나 수프로 거듭난 거죠. 그러니 사워 체리 수프를 만들 때는 체리 품종에 따라 설탕 양을 가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뜻밖에도 체리는 터키가 원산지. 터키에서 유럽과 미대륙으로 건너간 것인데, 국내에서는 미국산이 많이 보여 터키가 세계 1위 체리 생산국이란 건 의외죠. 사워 체리 수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포타주라는 형식, 와인, 생크림, 사워크림 등과 각종 스파이스 등의 재료로 미루어 볼 때, 유럽과 아시아와 중동의 요소가 융합된 헝가리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합니다. 하긴 어느 나라 요리에나 다 이역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죠. 일견 달라 보여도 깊숙이 들어가 보면 모두 하나의 나무에서 뻗어나간 듯한 요리가 수두룩…

쉽고 빠르고 시원하게 맛난 사워 체리 수프는 이 여름 꼭 드셔야 할 진미. 마침 헝가리에 간다면 꼭 맛보셔야 할 테고요.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 또 북미지역 등에서도 만날 수 있기야 하지만 그것으로 정통의 맛을 알았다고 한다면 본향 헝가리가 서운해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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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자란 디저트 애호가 이야기야말로 맛을 배가시킬 가장 빛나는 재료라 믿는 사람 네 가지 직업을 거쳐 현재 이야기꾼이자 디저트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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