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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다양한 그라탱 요리

날로 차가운 공기가 스미는 요즘. 자연스레 따뜻한 음식이 당기는 계절인데요. 이렇게 날이 차가워지면, 나에겐 유독 당기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그라탱(gratin). 엄마가 추운 계절 아침 식탁에 자주 올린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도쿄 살던 시절, 엄마는 추운 날이면 종종 식탁에 그라탱을 올렸어요. 오븐에서 갓 꺼낸, 노릇노릇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라탱은 몸도 덥히고 속도 든든해서 참 좋았죠. 집을 나와 전철을 타러 가는 동안 온기가 가지지 않아 기분 좋게 걸었던 기억도 아스라이 남아 있습니다.

속 재료는 주로 감자나 마카로니나 해산물. 때로는 시금치와 굴이거나…으깬 토란과 새우이거나… 대개는 간단한 일본풍 ‘그라탕’(그라탱의 일본어 발음=グラタン)이었어요. 일본식 그라탕은 본향의 것과는 달리 베샤멜소스(sauce béchamel)를 많이 쓰고 그밖에 케첩, 키코만 간장, 미소(味噌 일본 된장) 등도 소스로 동원되는데요. 속성으로 하면 재료를 소스와 섞고 치즈를 올린 뒤 오븐에 굽는 게 다. 특히 베이컨과 양송이버섯 듬뿍 ‘나포리탄’(ナポリタン, 케첩에 볶은 일본식 파스타)에 치즈 듬뿍 구운 버전은 참 좋아했죠. 생각해 보면 추울 때 속도 데우고 영양도 챙기는 일거양득의 요리이다 보니 엄마도 겨울이면 자주 ‘그라탕’을 식탁에 올렸지 싶어요.

토란과 새우 그라탱

본향 버전으로 제대로 만들자면, 이를테면 감자를 주재료로 한 그라탱 도피누아(gratin dauphinois)같은 것은 저온에 뭉근히 1시간쯤 굽고, 몇 분을 더 고온에 구워 크러스트(crust)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요. 소박한 음식이지만 시간과 공이 꽤 드는 요리이죠. 그 본고장 버전 그라탱 맛이 뛰어난 거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곳에서 환골탈태한 그라탕의 맛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도쿄의 요쇼쿠야(洋食屋 ,경양식집)나 깃사텐(喫茶店, 일본식 카페), 사카바(酒場, 술집) 등에서 ‘그라탕’들을 맛본다면 필시 고개를 끄덕이게 될 터.

원조 이야기부터 해야죠. 아시다시피 그라탱의 고향은 프랑스의 도피네(Dauphiné). 참고로 도피네는 프랑스 남동부 옛 주(州)의 이름이고, 현재는 이제르(Isère)현, 드름(Drôme)현, 오트잘프(Hautes-Alpes)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어쨌든 이 도피네가 그라탱의 발상지입니다. 프랑스와 스위스에 걸쳐 있는 알프스산맥의 산촌, 도피네에서는 흔하게 젖소를 방목했고 자연히 맛난 치즈나 버터와 우유가 생산되었죠. 이곳 동절기 주된 식량이었던 감자를 저장고에서 꺼내와 갓 짜낸 우유와 함께 조리하던 것이 그 시작인데, 바삭하게 탄 부분을 긁어 먹으면(gratter) 너무도 맛나 ‘그라탱’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

도피네의 향토 요리 그라탱 중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그라탱 도피누아’일 텐데요. 이 요리는, 18세기 샤를르 앙리(Charles-Henry) 공작 겸 중장이 오트잘프의 주도(州都) 가프(Gap)에서 연 만찬에 오르톨랑(Ortolan)과 함께 낸 것이 첫 데뷔 무대였다는 게 정설입니다. 잠깐 샛길로 새면, 오르톨랑은 ‘프랑스인의 영혼을 구하는 요리’라고 극찬을 받은 요리.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도 생애 최후 만찬에 이 요리를 먹었을 만큼 그 맛이 천하일품으로 여겨지지만, 개체 수 급감과 잔혹한 요리법 탓에, 1999년 도축과 섭식이 금지된 요리입니다. 소개가 꺼려질 만큼이나 기괴한 조리법은 ‘악마의 정원에서-금지된 음식이 지닌 죄악의 역사(In the Devil’s Garden: A Sinful History of Forbidden Food / 미국 저널리스트 스튜어트 리 앨런=Stewart Lee Allen 저)’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만…

그라탱 도피누아

여하튼 그 문제적 요리와 함께 등장했던 그라탱 도피누아.
1) 내열 그릇 안을 마늘로 문지른 후 버터를 바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2) 여기에, 껍질을 까서 얇고 둥글게 썬 감자를 포개어 나열한 다음, 우유를 붓고 그 위에 그뤼에르 치즈를 듬뿍 뿌린 후, 150도쯤에서 1시간 넘게 구워요.
3) 그리고 고온으로 올려 다시 10분쯤 겉이 살짝 타게 구우면 완성.
서서히 익는 감자에서 나온 전분과 우유가 섞이면 걸쭉한 소스이자 천연 조미료 역할을 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칠맛으로 차오르게 되죠. 유제품과 감자 특유의 고소함을 잘 융합시킨, 딱히 어려울 게 없는 조리법이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시간을 좀 요하는 요리… 그러나 바쁜 아침에도 휘리릭 만들 수 있는 조리법이 있습니다.

그라탱 도피누아, 바게트와 함께 즐겨보세요.

그라탱 도피누아의 대체 조리법은 간단합니다.
1) 슬라이스한 감자(2개쯤)를 팬(오븐에 넣을 수 있는 팬이면 더 편리)에 나열하고 소금, 후추, 타임 잎 등을 섞은 우유(1컵쯤. 고소함을 배가시키고 싶다면 생크림으로)를 부어서, 감자가 익을 만큼 끓여요(8분쯤. 한 벌 끓으면 약한 중불).
2) 내열 접시로 그대로 옮겨 담고 그뤼에르 치즈나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듬뿍 올린 후, 220도로 예열한 오븐(하단)에 10~15분(오븐마다 차이), 우유가 거의 다 졸아들 때까지 구우면 끝!

도쿄 세타가야(世田谷)구의 이케지리오오하시(池尻大橋)라는 동네에 가면, 니혼슈(日本酒, 일본주=청주) 그중에서도 칸자케(燗酒) 맛이 일품이라고 소문난 사카바가 있습니다. ‘칸자케’란 중탕 등으로 따뜻하게 데워 마시는 니혼슈의 총칭인데요. 참고로, 크게 나누자면 50도쯤으로 데워 마시는 것을 아츠칸(熱燗), 40도쯤으로 데워 마시는 것을 누루칸(ぬる燗), 그리고 45도면 죠칸(上燗) 등으로 부릅니다.

늘 애주가로 북적거리는 이 사카바에는 소위 ‘서양풍 안주’가 아주 맛난 것이 많은데요. 그중에서도 금방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쉽고도 맛이 출중한 것이 ‘무화과 그라탱’. 맛도 맛이지만 심플한 공정이 매력인데요. 다른 알코올류도 좋지만 기왕이면 칸자케에 곁들이면 금상첨화. 물론 바쁜 아침에 올리브오일에 바싹 구운 바게트를 곁들여 가벼운 끼니로 먹기도 좋고요.

무화과 그라탱 – 블루치즈 버전

재료는 무화과, 블루치즈, 꿀, 통후추 이렇게 단 네 가지.
1) 과숙이 되지 않은 무화과를 적당히 잘라 내열 접시에 올리고, 그 위에 블루치즈를 올려, 미리 250도로 예열한 오븐에 8~10분 구워요.
2) 여기에 꿀 한 바퀴. 그리고 통후추를 바로 갈아서 뿌리면 끝.
필자는 직전에 프라이팬에 섞어 향이 짙게 올라온 커민을 뿌리거나, 또 타임이 있다면 잎만 떼어 듬뿍 뿌려 먹기도 하는데요. 살짝 매캐한 풍미의 커민은 단맛과 짠맛 사이에서 좋은 악센트가 되어주고, 상쾌한 향의 타임 역시 맛의 시너지를 한껏 끌어올려 줍니다. 블루치즈는 디저트에 다용되는 돌체(dólce)가 아닌, 좀 더 쿰쿰하고 짜면서 농후한 맛인 피칸테(Piccante)를 써야 해요. 물론 부라타나 모짜렐라 등 좋아하는 다른 치즈로 대체해도 맛납니다. 어떤 쪽이건 그라나파다노 같은 경성 치즈를 조금 섞어 주면 더 맛나답니다.

무화과 그라탱 – 부라타 치즈 버전

상술한 사카바는 무화과의 철이 아닐 때에는 바나나나 골드키위로도 만들어 주는데 이것도 막상막하의 진미! 니혼슈 전문점 중에는 니혼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주류나 요리에 따라 술을 알맞게 데워주거나 도움말을 주는 사람인 ‘오칸반’(御燗番)이 있는 곳도 있는데요. 이 사카바의 오칸반의 조언에 따르면, 구워서 맛이 농후해진 무화과 그라탱에는 다소 낮은 온도인 40도 전후로 데운 칸자케가 최적이라고 합니다.

감 그라탱

고서점이 즐비한 간다(神田)의 요쇼쿠야에서 먹은 ‘감 그라탱’ 역시 10분 완성 요리. 무화과 그라탱처럼 단 10분 투자에 비해 제대로 깊은 감칠맛을 선사하는데요.
1) 감을 가로로 슬라이스 후 씨를 빼고 내열 접시에 올려요.
2) 그 위에 그라나파다노(혹은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등 경성 치즈와 모짜렐라 치즈(혹은 부라타)를 차례로 올리고, 250도로 예열된 오븐에 8~9분 구우면 끝.
마찬가지로 꿀, 커민 등 기호에 맞는 향신료를 뿌려 먹으면 훨씬 맛납니다. 중요한 건 오븐을 충분히 예열한 다음 굽는 것(최소 10분). 그래야 단시간에 응축된 맛을 끌어올릴 수 있어요. 파프리카 파우더를 솔솔 뿌려 향미도 더하고 풍미도 더하면 한층 더 맛있어지고요.

마지막으로, 그 이름도 고혹적인 스웨덴 버전 그라탱 ‘얀손의 유혹’ 이야기입니다. 스뫼르고스보르드(smorgasbord, 여러 요리를 차려 놓고 뷔페식으로 각자 덜어 먹는 스웨덴 전통 식사법)의 하나로, 스웨덴에서는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요리이자,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요리인데요. 우선 독특한 요리 이름에 여러 설이 있습니다. 19세기 채식주의자이자 종교인인 에릭 얀손(Eric Janzon)이 너무 맛나 보이는 모양과 향에 못 이겨 먹고 말았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요리를 아주 잘한 오페라 여가수 펠 얀손(Pelle Janzon 1844~1889)이 맛난 요리로 남성을 유혹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

또, 스웨덴인 작가 군나 스티그마크(Gunnar Stigmark 1910~2001)가 자신의 어머니가 1929년 새해 파티에 이 요리를 내면서, 지난해에 공개된 무성영화 ‘얀손의 유혹(Janssons frestelse)’의 이름을 가져와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매우 맛난 요리이니 제설이 난무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정말 그만큼이나 맛납니다.

얀손의 유혹

빠르게 간단하게 만드는 버전.
1) 프렌치프라이보다 조금 도톰하게 썬 감자(2개쯤), 아주 얇게 채 썬 양파(1개쯤)를 뒤섞어서 내열 접시에 담아요.
2) 다진 앤쵸비(7~8마리), 타임 잎 등 허브나 클로브 약간, 설탕 1꼬집, 월계수 잎 1, 후추와 소금 1꼬집, 생크림 180ml를 섞은 것을 내열 접시의 감자와 양파 위로 부어요.
3) 그 위로 적당한 크기로 썬 버터(10g쯤)를 여기저기 올리고 빵 가루(약 2큰술) 흩뿌리고, 200~220도로 예열한 오븐에 20~30분(오븐 따라 차이. 생크림 다 졸아들 때까지만) 구우면 끝.
얼마나 맛난지 몰라요. 뜨끈뜨끈, 고소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UMAMI 덩어리 ‘얀손의 유혹’도 추운 날 안성맞춤!

사족. 감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것 하나. 프랑스 맥도날드에서 ‘딜럭스 포테이토’를 드신 적이 있나요? 미식의 도시 마지막 방문의 기억은 아득하지만, 엉뚱하게도 ‘파리’하면 이 감자가 생각날 때가 많은데요. 언젠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맥도날드로 향한 적이 있는데, 어찌나 맛났던지 두고두고 생각이 나거든요. 일반적인 프렌치프라이가 아닌 훨씬 크고 도톰하게 썬 감자를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포슬포슬하게 튀겨낸 건데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맛났어요. 여기 이렇게 꼭 적고 싶었을 정도이니… 물론 순전히 주관적인 견해이긴 합니다만.

그러고 보면 감자는 어느 식당에서나, 아니 어느 나라에서나 다용되는 흔한 식재료인데요. 프랑스에서는 한때 감자가 나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여겨진 적도 있었죠. 그래서 의회가 1748년 감자 재배를 금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농학자이자 약제사, 그리고 영양학자였던 앙투완 오귀스탱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 1737~1813)는 그런 와중에도 감자의 보급과 연구에 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 노력의 결실로 흉작이 든 1785년 프랑스 북부 지역 사람들은 감자 덕에 기근을 면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감자가 프랑스 전역에 확산되었던 건데요. 파리 지하철 3호선에는 파르망티에 역도 있죠. 플랫폼 한 켠에는 파르망티에가 함께 서 있는 이에게 감자를 건네는 모습의 조각도 놓여 있고요. 감자 사랑이 깊은 자는 여로에서도 이런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모쪼록 추운 계절 몸과 마음이 따뜻해질 다양한 그라탱들, 꼭 만들어서 드셔 보시기를 바랍니다.

by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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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자란 디저트 애호가 이야기야말로 맛을 배가시킬 가장 빛나는 재료라 믿는 사람 네 가지 직업을 거쳐 현재 이야기꾼이자 디저트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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