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맥주 신맛을 찾아 떠난 여행 – 태평양조 방문기

신맛은 인류가 신선한 음식과 상한 음식을 구분하기 위해 감지한 맛이라고 합니다. 신맛 그 자체는 인류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맛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와 먹으면 탈이 나는지를 구분하기 위해 신맛을 학습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발효와 부패를 체험하면서 생명을 유지했고 생존의 맛을 찾아냈습니다. 한마디로 신맛은 생존의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신맛은 더 이상 생존의 맛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신맛의 또 다른 매력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신맛이 다른 맛과 어울려 맛과 향을 증폭시킨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과일이 단맛과 향에 신맛이 어우러져 매혹적인 풍미를 풍기는 것처럼 다른 음식에서도 신맛의 매력을 찾은 것입니다.

신맛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분야에서도 신맛의 매력을 찾아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맥주입니다. 과거의 인류는 맥주의 신맛을 경계했습니다. 과거의 맥주 애호가들이 신맛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땅한 보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신맛이 나는 맥주를 일상적으로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맥주의 발효에 효모가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혀낸 것은 이제 겨우 150년 전입니다. 1870년 루이 파스퇴르는 맥주에서 발효의 마법이 효모의 역할임을 밝혀냈고, 이후 칼스버그의 한센은 맥주의 발효에 필요한 순수 효모만을 배양했습니다. 이렇게 맥주의 효모를 통제하기 시작하자 맥주의 신맛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그렇게까지 통제하고 싶었던 맥주의 신맛을 이제는 일부 맥주에서 자연스럽게 허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쳐 날뛰는 야생마 같은 신맛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통제하에서 절제된 신맛입니다. 기존의 국가 대표 효모가 맥주를 만드는 선수였다면, 맥주에 신맛을 내는 선수로 미생물과 야생 효모를 영입하고, 그것을 감독이 잘 통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감독은 양조사입니다.

이렇게 신맛이 나는 맥주를 통칭하여 사우어 에일이라고 부릅니다. 국내 사우어 에일은 201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자가 생산 맥주를 통해 개인이나 동호회 수준에서 양조하던 사우어 에일을 전문 맥주 양조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때가 이 무렵입니다. 2014년에 시작한 와일드 웨이브 브루잉은 당시 한국인에게 생소한 사우어 에일을 소개해 한국의 맥주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습니다. 이후 사우어 에일은 여러 맥주 양조장에서 앞다투어 생산하는 맥주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팜하우스 에일이나 독일의 고제와 베를리너바이쎄 스타일, 벨기에의 세종 스타일은 이제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맥주입니다. 그리고 최근 사우어 에일로 시선을 끌고 있는 맥주 양조장이 있습니다. 설립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태평양조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태평양조는 문경의 한적한 시골에 있습니다. 문경 시내에서 자동차로 간다면 약 15분 정도 걸립니다. 저는 대전에서 출발하여 화사 나들목에서 나와 국도로 40분을 더 달렸습니다. 산을 넘고 천을 따라 달리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 그 시간이 아주 짧게 느껴졌습니다. 태평양조는 시골의 폐공장을 사들여 거의 그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천정이 높은 하나의 넓은 공간에 양조 시설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치 거대한 대왕고래의 배 속에서 용연향을 만들 듯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당연히 맥주 바나 브루펍도 없고 앉아서 맥주를 마실 작은 공간조차 부족합니다. 구석의 작은 사무실에서 김만종 양조사를 만났습니다. 그에게서 들은 사우어 에일의 비밀은 흥미로웠습니다.

태평양조의 양조장은 거대한 고래 배 속 같습니다. 그 속에 양조 시설이 가득합니다.

태평양조는 팜하우스 에일과 사우어 에일을 만듭니다. 팜하우스 에일은 옛날 유럽의 농가에서 만들던 맥주라 할 수 있습니다. 팜하우스 에일이 모두 사우어 에일은 아니지만 주로 산미가 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과거 유럽에서는 농산물을 수확해 좋은 것은 팔거나 먹고, 남은 농산물로 겨우내 맥주를 만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계절이 지나 따뜻해지면 겨울에 만들고 저장된 맥주를 마셨습니다. 맥주에 사용된 보리와 밀은 전문적으로 관리되지 않았습니다. 농가 주변에는 각종 박테리아나 천연 효모가 가득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시골 냄새가 가득한 맥주는 따로 팔려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 노동이 시작되는 계절에, 우리가 막걸리를 마시듯, 농가의 힘든 노동을 덜어내기 위해 마셨습니다. 이런 맥주들이 현대에 와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과거의 노동주를 재해석하여 재현한 스타일이 팜하우스 에일로 자리 잡았습니다. 와일드 에일도 비슷한 맥락이 있습니다. 와일드 에일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거칠고 종잡을 수 없는 맥주들을 하나의 맥주 스타일로 분류하고 붙인 이름이고 팜하우스 에일보다 조금 넓은 의미로 쓰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야생의 효모나 박테리아를 사용하는 대신 그걸 잘 정제하여 배양한 와일드 효모를 사용해서 만듭니다.

반면, 사우어 에일은 팜하우스 에일이나 와일드 에일보다 좀 더 신맛에 집중한 스타일입니다. 와일드 효모를 사용하면 큼큼한 냄새나 흙냄새, 오래된 집 냄새 같은 것들이 나곤 하는데, 사우어 에일은 아예 이런 향이 나오지 않습니다. 좀 더 상쾌하고 경쾌한 신맛이 납니다. 맥주의 신맛은 발효 시 젖산을 사용하는데 귤이나 레몬과 같은 신 과일의 산미를 사용해 신맛을 끌어 올리기도 합니다. 팜하우스 에일과 사우어 에일의 공통점은 다른 음식과 정말 잘 어울린다는 점입니다. 샴페인이나 화이트 와인이 해산물이나 기타 여러 음식과 조화로운 이유와 비슷합니다.

신맛과 야생의 성질은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입혀집니다. 발효가 시작되는 단계에서 pH(수소 이온 농도 지수)를 어느 정도 떨어트려 놓고 야생 효모나 블렌드 효모를 넣습니다. 특히 pH를 떨어트려 주는 특수한 효모를 사용합니다. 태평양조의 팜하우스 에일은 발효와 숙성 기간이 무려 10개월이나 걸립니다. 이 기간 양조사는 계속 예의주시하면서 중간중간 효모를 추가 주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맥주에 비해 양조사의 예상과 다르게 나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다르게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좋지 않은 건 아닙니다. 예측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너무 맛있는 경우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태평양조는 발효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산화된 느낌을 받은 맥주가 나온 적도 있어, 이런 맥주를 증류기 테스트 용도로 썼다고 합니다.

와일드 가든 청수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은 라벨링 작업 중.

태평양조는 최근 ‘와일드 가든 청수’라는 팜하우스 에일과 ‘민트 사워’라는 사우어 에일을 출시했습니다. 와일드 가든 청수는 몰트를 구성하는 배합에서 밀을 사용합니다. 보리 맥아와 밀 맥아의 비율이 3:7일 정도로 밀 맥아의 비율이 높습니다. 밀은 안동의 맹개마을 밀과 진주의 앉은뱅이 밀로 모두 국산 토종 밀입니다. 우리나라 토종 밀이 맥주를 만드는데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맥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발효는 두 번 진행됩니다. 판매하는 와일드 효모와 야생에서 채집한 효모를 배합한 효모로 1차 발효하고, 국내에서 ‘264 청포도 와인’을 만드는 청수 농장에서 재배한 유기농 포도와 포도에서 채집한 효모를 통해 2차 발효를 합니다. 와일드 가든 청수의 맛은 샴페인이나 화이트 와인이 연상됩니다. 약간의 타닌감이 있으면서 상쾌하고 균형감이 있는 내추럴 와인 같다고 양조사는 말합니다. 팜하우스 에일의 특성상 지금보다는 6개월 뒤가 맛있을 거라고 덧붙입니다.

양조장 한 구석에서 와인을 담았던 배럴이 제 할 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트 사워는 사우어 에일입니다.이 또한 두 번 발효합니다. 영주에는 ‘무량수’라는 브랜드로 된장과 간장을 만드는 만포농산이 있습니다. 이 농장에서 뜬 매주에서 채집한 누룩을 사용해 1차 발효를 하고, 세종 효모를 추가로 사용해 발효합니다. 민트 사워의 특별한 맛의 비밀은 숙성 과정에 있습니다. 숙성 과정에서 방아잎과 오미자, 간장의 소금 결정체를 사용해서 향이 강하고 감칠맛도 감돕니다. 방아잎은 경상도 방언으로, 표준어로는 배초향이라는 식물입니다. 향이 강해 ‘향을 밀어낸다’라는 뜻이 있는 식물로 영어 이름이 ‘Korean Mint‘일 정도로 한국적인 재료입니다. 박하 향이 납니다.

태평양조가 사우어 에일 전문 양조장이지만, 크래프트 맥주 업계에서 대중의 요구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태평양조에서 연중 생산되는 맥주로 위트 비어인 ‘태평화이트’와 뉴잉글랜드 IPA(이하 뉴잉)인 ‘팜트리’가 있습니다. 태평화이트는 일반적인 밀맥주에서 나는 정향의 느낌을 최소화하고 대신 바나나의 느낌을 살려 최대한 음용성이 좋은 밀맥주입니다. 팜트리는 강한 뉴잉을 추구하며 미국 서부의 IPA와 동부의 IPA의 느낌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뉴잉의 직관성을 높이고자 조금 더 헤이지하고 편안한 스타일로 다시 만들기도 했습니다.

태평양조는 브루어리을를과 협업하여 ‘미지수’라는 훈연 사우어 에일을 만들었습니다.

태평양조는 2023년에 생겨났으니 신생 양조장일까요? 태평양조의 양준석 대표와 김만종 책임 브루어는 안동맥주를 설립하고 10년 이상 이름난 맥주를 만들어 낸 맥주 동료입니다. 신생 양조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양조장을 돕는 역할을 하는 선배 양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생긴 브루어리 을를과의 협업입니다. 브루어리 을를은 양조장을 건설하는 시기를 이용해 주변의 선배 양조장의 도움을 요청했고 태평양조는 흔쾌히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협업 맥주가 훈연 사우어 에일인 ‘미지수’와 뉴잉글랜드 IPA인 ‘문희경서’입니다. 그 밖에 태평양조는 노비어 노라이프와 ‘죠리죠리 사우어 에일’, 호피홀리데이와 ‘홉희홀리데이 IPA’, ‘성광포터’, 타일러 브루어리와 ‘올드 스쿨 러브 웨스트 코스트 IPA’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금관악기가 매혹적인 선율을 만들어 내듯, 장차 매혹적인 풍미를 가진 위스키를 꿈꿔 봅니다.

양조사를 따라 양조장을 둘러봤습니다. 배럴과 쿨십이 보입니다. 배럴과 쿨십은 자연 발효 맥주를 만들 때 신맛과 고약한 맛을 입히는 중요한 장비입니다. 어떤 맥주는 배럴에서 맥주가 익어갈 때 입히기도 하고, 어떤 맥주는 맥아즙을 쿨십에서 식히는 과정에서 입히기도 합니다. 양조장 구석에서 언제 출정할지 모를 배럴과 쿨십이 제 할 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조장을 조금 더 둘러봤습니다. 그러다 맥주 양조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비를 발견했습니다. 위스키를 만드는 금관악기를 닮은 증류기입니다. 태평양조는 위스키에도 도전한다고 합니다. 아직은 양조에 실패한 맥주를 증류기를 사용해 시험 양조를 하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맥주 양조장에서도 수준 높은 위스키를 생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염태진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맥주에세이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카카오, 브런치 아이디: @iharu

관련 아티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