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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로 성을 쌓다, 비어테인먼트를 꿈꾸는 고부루

제주에는 맥주 양조장이 몇 개나 있을까요? 참고로 제주보다 조금 작은 일본의 섬 오키나와에는 15개의 양조장이 있습니다. 반면 제주에는 4개의 맥주 양조장이 소중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중 코스닥 상장 기업이기도 한 제주맥주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2016년부터 제주에 자리 잡은 맥파이 브루잉(2012년도 설립) 또한 제주의 맥주 터줏대감입니다. 중산간 지역으로 내려오면 금오름 근처에 탐라에일이라는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귀포에는 대한민국 최남단의 맥주 양조장 고부루(GoBrew)가 있습니다.

제주에서 양조장을 찾아가는 과정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양조장 투어를 제공하는 곳은 제주맥주와 맥파이가 있습니다. 두 양조장은 모두 사전 예약을 하고 양조장 탐방을 할 수 있지만, 공통으로 도심지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다는 점이 애로사항입니다. 양조장 투어라는 것이 시음을 동반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택시를 잡기도 어렵고 버스도 드문드문 다니기 때문입니다. 탐라에일 또한 도심지에서 떨어져 있고, 규모가 작은 편이라 양조장 투어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양조장에 찾아가려면 사전에 양조장 직원과 약속하고 찾아가 볼 수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주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양조장이 고부루입니다. 고부루는 서귀포 시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변에 천지연 폭포나 칠십리시공원, 서귀포 예술의 전당 등이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고부루는 맥주 양조장에서 생산한 신선한 맥주를 바로 마실 수 있는 브루펍(Brewpub)이 한 공간에 있습니다.


고부루는 맥주로 쌓은 작은 성을 보는 느낌입니다. 

고부루에 들어서면 맥주로 쌓은 작은 성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고부루는 총 4개의 층과 루프탑으로 이루어진 맥주 성입니다. 이 성은 맥주라는 펜스 안에서 맥주가 주는 모든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1층은 사시사철 맥주가 익어가는 맥주 공장입니다. 양조 시설을 바로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탭룸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2층은 브루펍입니다. 여느 펍처럼 맥주바와 테이블이 있지만, 날씨가 좋으면 모든 창문을 열 수도 있고, 맥주 테라스까지 있어 한층 개방감이 있습니다. 3층과 4층은 맥주 펜션입니다. 펜션이면 펜션이지, 맥주 펜션이라고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루프탑에 오르면 야자나무가 있는 다소 이국적인 서귀포 북쪽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멀리 한라산까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고부루는 왜 이렇게 맥주로 성을 쌓게 된 것일까요? 고부루의 고선욱 대표는 맥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맥주로 성을 쌓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맥주로 성을 쌓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고, 그의 경험이 하나하나 축적된 결과가 바로 이 성입니다.

고 대표는 1997년 서울 대학로에서 펑키블루라는 펍을 시작하면서 맥주와 인연을 맺습니다. 그 후 처가가 있는 제주로 이사하여 제주시청 근처에 캔사스라는 펍을 열어 24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일 맥주를 취급하다 보니 맥주에 더욱 관심이 생겼고, 그러던 차에 2002년도에 우리나라에도 소규모 맥주 면허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고 대표는 당시에 하우스 맥주라고 불렸던 수제 맥주의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상업 맥주가 아닌 맥주 애호가들이 만드는 맥주가 새로웠던 것입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맥주 책을 찾아 공부하고, 맥주 공방을 찾아다니며 수제 맥주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 2014년도에 수제 맥주 법안이 바뀐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양조장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양조장 부지를 알아보고, 자가 맥주 제조로 하던 맥주 레시피를 상업 양조 레시피로 바꿨습니다. 2015년도부터 양조장 건설에 착수해서 시험 양도 허가를 받고 2018년 고부루비어컴퍼니를 서귀포 서흥동에 열었습니다.


고부루비어컴퍼니는 2018년  서귀포 서흥동에 설립되었습니다.

양조장 이름을 고부루비어가 아닌 고부루비어컴퍼니라고 한 이유는 단순히 맥주만을 양조하는 양조장이 아닌 맥주와 관련된 여러 가지 상품을 개발하고 맥주 사업을 넓혀 가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가령, 맥주 효모와 홉을 이용한 맥주 스파를 만들 수도 있고, 효모를 이용한 화장품을 만들 수도 있으며, 맥주로 고기를 재워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맥주를 활용한 전반적인 제품을 생산하고 싶었고, 그 포부를 양조장 이름에 담았습니다. 고부루(GoBrew)라는 뜻은 말 그대로 ‘맥주의 길을 간다’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제주에는 고 씨가 많은데, 제주를 대표하는 성씨처럼 제주를 대표하는 맥주가 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양조장에 사람 이름을 부여하여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브루’라고 부르면 왠지 외국어처럼 느껴지지만, ‘고부루’라고 부르면 제주도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맥주도 놀이가 될 수 있을까요? 맥주는 마시는 즐거움도 주지만, 놀이로서의 즐거움도 줄 수 있습니다. 고부루에 맥주로 즐거움을 주는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고부루에는 맥주 양조 시설을 바라보며 효모가 부리는 마법을 느껴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부루에서 맥주를 마시다 취기가 오르면 잠시 펍을 벗어나 산책해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알코올이 한계에 다다르면 그대로 펜션으로 올라가 쓰러져 잘 수 있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고부루에서는 음식으로 세계 여행을 떠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맥주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고부루에서 맥주가 주는 즐거움을 하나하나 소개해 보겠습니다.

[맥주 펜션]
처음 고부루를 알게 되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이 맥주 스파가 있는 맥주 펜션이었습니다. 이번 제주도 맥주 양조장 취재 여행에서 고부루 펜션에 머물면서 펜션에 대해서도 샅샅이 살펴봤습니다. 객실에 들어서면 우선 미국식 인테리어에 눈이 즐겁습니다. 마치 전 세계를 여행하는 듯합니다. 수많은 그림 액자와 패치, 그리고 특이하게도 의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러한 인테리어 컨셉은 고 대표가 미국으로 갔던 양조 여행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 대표는 앞으로 만들어갈 맥주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샌디에이고, 라스베이거스, LA, 애틀랜타, 뉴올리언스 등의 크고 작은 맥주 양조장을 방문했는데, 여러 숙박업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펜션 사업의 방향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객실은 뉴올리언스의 미국 남부와 샌디에이고의 미국 서부 스타일을 기본으로 레트로하면서도 도시적인 감성을 적절히 섞어 완성했습니다. 여행 중 구매한 소품과 액자, 그림을 인테리어에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하던 맥주 스파는 침대 건너편 창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맥주 펜션에 들어서면 미국식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맥주 스파]
간혹 TV에서 독일의 맥주 스파를 부러워하며 본 적은 있지만, 한국에도 맥주 스파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고부루의 맥주 스파는 고 대표가 양조장 건물을 지을 당시부터 계획했던 것입니다. 고 대표는 맥주를 양조의 영역을 넘어 산업의 영역으로 깊이 생각했고, 맥주 양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활용해 상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맥주 효모를 이용하여 화장품을 만들 수도 있고, 각종 음식 재료를 숙성하거나 발효하는 데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맥주 스파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맥주 스파는 맥주 양조의 부산물인 맥주 효모와 홉을 입욕제로 이용합니다. 맥주 스파는 객실마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2층 레스토랑에서 만든 음식과 맥주를 룸서비스로 즐길 수도 있습니다. 스파에 몸을 담그고 맥주가 주는 즐거움을 즐겨 보시길 바랍니다.


고부루에는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맥주 스파가 있습니다. 

[맥주 음식]
고부루의 펍은 단순히 맥주만 서빙하는 펍이 아닙니다. 흔히 폅과 탭룸을 구분할 때 음식의 제공 여부를 따집니다. 쉽게 말하면 음식을 제공하면 펍,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탭룸이라 말합니다. 고부루는 펍을 넘어 그 자체가 훌륭한 레스토랑입니다. 음식 중에서는 멕시코 음식이 단연 돋보이고, 맥주와 잘 어울립니다. 고부루의 멕시코 스타일의 음식은 가벼운 길거리 음식부터 중후한 레스토랑 음식까지 있어, 가벼운 스타일의 맥주부터 도수가 높고 풍미가 깊은 맥주까지 잘 어울립니다. 저는 여러 멕시코 음식 중에서 텍스멕스 스타일의 트리플 파히타를 귤라임 라거와 함께 마신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텍스멕스(Tex-Mex)란 텍사스와 멕시코를 합성한 단어로, 멕시코의 영향을 받아 미국 남부 지방에서 인기 있는 요리를 말합니다. 파히타 또한 텍스멕스 스타일 요리 중 하나로 토르티야에 여러 가지 야채와 고기를 싸서 먹습니다. 고부루의 파히타는 풀드비프(Pulled Beef), 닭가슴살, 쉬림프 이 세 가지를 직접 만든 수제 사워 크림이나 살사소스에 살짝 찍어, 구운 토르티야에 야채와 함께 싸서 먹습니다. 특히 트리플로 불리는 기본 재료는 8시간 동안 향신료에 담근(마리네이드라고 부르기도 함) 쇠고기를 오븐에서 구운 후 토마토와 각종 허브를 넣어 조리한 풀드비프(Pulled Beef), 커리와 타코로 담근 후 구워 낸 닭가슴살, 마늘과 버터로 조리한 쉬림프로 조리 과정에 정성이 가득합니다. 최근에 에일 스타일에서 라거 스타일로 레시피를 변경한 귤라임 라거는 코로나가 연상되는 멕시코 라거 스타일로 파히타와 잘 어울립니다.


고부루의 귤라임은 파히타와 잘 어울립니다.

[맥주 산책]
시음과 함께하는 인터뷰 도중 취기가 올라 잠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양조장 건물에서 길 하나 건너면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공원이 있습니다. 칠십리시공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귀포시에서 관리하는 공원입니다. 제주의 많은 공원이 외부에서 온 관광객을 대상으로 꾸며졌지만, 이 공원만큼은 서귀포 시민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하지만 관광객이 일부러 찾아와도 좋을 만큼 훌륭한 관광지입니다. 이곳에서는 멀리서 천지연 폭포를 한눈에 감상할 수도 있고, 전망대에 올라 해가 질 무렵 노을 지는 서귀포항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1시간 정도 알 수 없는 새소리와 처음 보는 식물의 이름을 새기며 공원 산책을 한 후 다시금 맨정신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습니다.


고부루의 건너편에 있는 칠십리시공원에서는 멀리 천지연 폭포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맥주]
맥주와 관련된 많은 즐거움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큰 즐거움은 맥주 그 자체입니다. 고부루의 대표 맥주로 귤라임 라거, 월정리 IPA, 메모리즈 스타우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귤라임은 원래 제주의 감귤을 주제로 만든 에일이었지만, 상큼함을 강조하기 위해 라임을 추가하여 라거로 레시피를 변경하였습니다. 매일 마실 수 있는 테이블 맥주로, 청량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멕시코 음식과 잘 어울립니다. 레시피를 바꾼 것인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할 정도로 고부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가 되었습니다. 월정리 IPA는 6가지 홉과 캐러멜 몰트를 사용한 웨스트 코스트 IPA입니다. 제주도 월정리 해변의 석양을 연상하며 만들었고 풍성한 열대과일 향과 강한 쓴맛이 조화로운 IPA입니다. 고부루의 시그니처 맥주는 메모리즈 스타우트입니다. 대부분의 스타우트는 바닐라 빈이나 유당을 넣어 맛의 변화를 주지만, 메모리즈는 홉과 스페셜 몰트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너무 무겁지도 너무 화려하지 않게 변화를 주었습니다. 절제된 풍미를 내는 메모리즈는 달콤하고 새콤한 제주 감귤초콜릿과 잘 어울립니다. 고 대표는 메모리즈의 특유한 한 맛이 마신 후에도 계속 기억에 남아 맥주 이름을 메모리즈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고부루에는 맥주와 관련된 많은 즐거움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큰 즐거움은 맥주 그 자체입니다.

서두에 오키나와와 비교하여 제주에 있는 맥주 양조장을 언급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알려졌지만, 고부루와 같은 작은 양조장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고부루는 그동안 맥주를 양조하고 맥주를 상품화하는 데에만 주력했을 뿐 그것을 알리는 데 소홀했다고 합니다. 이제 고부루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과 대구 등 맥주 축제에도 적극 참여하며 대중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대중은 제주로 향하고, 고부루는 대중을 향하고 있습니다. 제주에 고부루와 같은 작은 양조장이 널리 알려져, 오키나와 부럽지 않은 제주만의 수제 맥주 문화가 생기기를 희망합니다.

염태진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맥주에세이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카카오, 브런치 아이디: @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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