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책 편집자로 일하는 나는 최근 인문 분야 번역서 편집 작업을 맡았다. 이 책에는 영어를 활용한 언어유희는 물론 프랑스어 용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번역문 초고를 원서와 비교하며 세 언어가 얽힌 이 글이 어떻게 하면 한국 독자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닿을 수 있을지 번역가 선생님과 함께 고민하던 머릿속에 문득 Chat GPT가 떠올랐다. 드디어 이 녀석을 제대로 써먹을 때가 온 건가? 매달 20달러씩 내면서도 지금껏 점성술 차트를 해석해 달라거나 일정을 표로 만들라는 시시껄렁한 주문만 해온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 ‘간단한 정보만 물어봐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던데 복잡한 일을 제대로 하겠어?’와 ‘나보다 너무 빠르게, 너무 훌륭하게 일을 해내는 거 아니야?’ 사이에 놓인 막연한 감정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없는데도 꽉 막혀 있던 몇 단락을 넣어본 뒤 막연했던 감정은 두려움이라는 구체적인 얼굴을 갖추었다.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요청에 따라 흩어져 있던 정보를 적재적소로 꺼내 오는 솜씨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역할은 질문을 던지고 의심이 드는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알파고> 포스터. 이미지 출처: Google DeepMind 유튜브 채널
먼저 온 미래
나는 이런 경험을 상당히 늦게 한 축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 의한 직업적 위기를 가장 먼저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2016년 3월을 지나온 한국인이라면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먼저 온 미래>는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한 이후 바둑계가 맞닥트린 변화를 꼼꼼히 들여다보며 다른 업계, 특히 문학계와 인간의 삶 전반에 닥쳐올 일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저자 장강명은 기자 출신 소설가다. 취재를 할 줄 알고, 그 내용을 독자가 몰입할 만한 방식으로 엮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인공지능으로 위협받는 일의 종류를 이야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소설 쓰기를 업으로 삼은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저자는 프로 바둑 기사를 비롯한 바둑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2016년 당시 바둑계에 인 파장과 이후 바둑 연구나 교육 방식에 일어난 변화, 바둑인들이 모색하는 미래의 모습 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면서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내기 시작할 때 문학계는, 소설가는,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은 무엇이 될지를 헤아린다. 그 예측은 꽤나 설득력이 있고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

당신의 직업은 안전한가요
당연한 말이지만 바둑계는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한 이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충격으로 바둑계를 떠난 기사도 있고, 남은 프로 기사들의 권위도 전과 같지 않다. 프로 기사와 바둑 한 번 두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던 아마추어들은 이제 어떤 초일류 기사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바둑 AI 프로그램을 스승으로 모신다. 프로 기사 자신들도 AI를 활용해 연구한다. 초반 30~50수는 아예 AI가 제시한 수를 그대로 외워서 둔다. 인간 기사가 인공지능이 추천한 수대로 둘 확률을 뜻하는 ‘AI 일치율’이라는 개념도 생겼다. “‘AI 일치율이 높다’라는 말은 곧 그 기사가 강하다는 뜻이었다.”(75쪽)
바둑은 예술이고 그 안에는 심오한 철학까지 담겼다는데 왜 자존심을 버리고 AI에 의존하는 걸까? 그 수가 어째서 옳은지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조차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둔다면 바둑은 여전히 바둑일 수 있을까? 그러나 프로 기사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알파고의 바둑계 은퇴(?) 이후 경쟁하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이고, AI를 활용하는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의 승률은 천지 차이였기 때문이다. AI를 거부한 기사들은 모두 경쟁에서 밀려났고 살아남지 못했다. 저자는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같은 고민은, 실제로 그 분야에서 쓸 만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81쪽)고 단언한다.
계속 읽다 보면 이런 일은 나를 포함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당신이 업계 일류라면 당신의 일자리는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활용하거나 적어도 의식하지 않은 채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일을 할 수는 없을 테고, 명목상 ‘도우미’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의 답을 표준으로 여기는 시선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나처럼 좋아하는 분야에서 소소한 프로젝트에 임하는 사람이라면 안타깝게도 당신의 일자리는 꽤나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것이다. 바둑 교육 현장에서 인간 선생님이 권위를 잃고 보조적 위치로 밀려났듯이.

이 책에 따르면 대중음악 시장에서는 그런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인공지능 작곡가가 만든 곡 혹은 인간 작곡가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만든 곡이 OST나 배경음악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이제 화젯거리도 되지 못한다. AI 기반 음악 제작 앱 ‘부미’ 측에서는 2019년 이후 이용자들이 부미를 사용해 만든 음악이 전 세계 녹음 음악의 13.78%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같은 현상이 곧 문학계에서도 일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그래서 예술이 뭔데요?
잠깐. 인공지능이 썼거나 인간 작가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쓴 작품이 문학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음악의 사례를 문학에 대입하자 새삼 충격이 느껴졌다. ‘배경 음악 정도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문학은 어림없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이란 인간의 생로병사, 희로애락과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예술이라고 여겼으니까. 몸으로 부딪쳐 삶을 살지 않는 인공지능은 좋은 문학을 쓸 수 없고, 좋은 문학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해도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좋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문학이란, 예술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인공지능의 출현이 그동안 인간 사이에서 모호한 상태로 통용되던 언어의 정의를 되짚어 보게 한다고 여러 번에 걸쳐 이야기한다. 바둑이 예술이라면 바둑의 무엇이 예술인지, 각각의 수를 결정하는 과정인지,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올려두는 행위인지, 아니면 완성된 기보 그 자체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인공지능의 바둑도 예술이 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의 창작과 소비, 평론에 침투할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훌륭한 문학’과 ‘예술성’의 기준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구체적인 전망은 높은 확률로 모두 빗나가겠지만 “문학이 인공지능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훼손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인공지능은 못 하고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바둑계 일부에서는 ‘인간의 바둑’을 이야기한다. AI와 인간의 실력 차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아마추어들은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바둑의 즐거움 그 자체를 즐기고, 프로 기사들은 바둑판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과 그 자리에 앉기까지의 노력, 국가 간 대국에서의 애국심 같은 인간 고유의 감정과 서사로 대중을 끌어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묻는다. “탁월함을 첫 번째 목표로 추구하지 않을 때 예술은 무엇이 될까?” 출판사들이 탁월한 실력 대신 특별한 인생 스토리를 가진 인간 작가를 발굴해 그의 별 볼 일 없는 원고를 AI로 다듬어 출판한다면, “그걸 ‘인간의 문학’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때도 소설을 사랑할 수 있을까?”(251쪽) 그런 뒤에는 AI 시대의 소설가들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앞선,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방식을 인공지능이 멋대로 바꿔도 되나?”(271쪽)라는 질문으로 향한다.
이런 질문은 하는 사람만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피곤하게 산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질문이 21세기 버전의 러다이트 운동처럼(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무용하게 애를 쓰는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스로 거듭 강조하듯 저자는 기술의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기술이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하고 있는데도 기술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니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새로운 기술 때문에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위하는 태도가 어째서 문제적이며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문제를 정의하고 그 정의를 논리적・경험적 근거로 뒷받침하는 내내 날카로운 시선과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저자는 마지막 장에 희미한, 그러나 커다란 희망을 남겨둔다. 나는 이 희망이 희미한 만큼 순진하고 커다란 만큼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거대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한 사람이 책 한 권으로 내놓을 수 없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사기꾼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희망은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