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제일 왕성하게 활동하는 아티스트,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의 전시가 롯데 뮤지엄에서 열려서 다녀왔습니다.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국내에는 포르쉐 코리아의 2020년 행사에서 부서진 포르쉐911로 크게 주목을 받았어요. 잔뜩 깨져버린 석고상 같은 모습인데, 여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걸까요?
다니엘 아샴의 주요 작품들을 요약해서 보여드릴게요. 듬성듬성 깨져버린 스타워즈 로봇, 깨진 틈 사이로 자수정이 박혀있는 디올 시계, 부식 돼버린 농구공, 거대한 포켓몬 카드 석고상까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물들이 오래된 유물이 되었습니다. 모두 아샴을 대표할 만한 디테일을 가진 작품들인데요. 우리가 교과서에서나 보던 조각상이 현재의 사물들로 치환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에 롯데뮤지엄에서 열리는 다니엘 아샴의 전시 <서울 3024>는 꽤 규모가 큰 아샴의 개인전이었어요. 전시 제목 그대로 천 년 후 미래에는 어떤 유물이 있을까, 상상해 보게 만드는 전시였어요.
다니엘 아샴은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마이애미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뉴욕에서 회화를 전공했다고 해요. 아샴은 2007년부터 ‘더 하우스(The House)’라는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창립해 조각, 회화, 건축, 영화, 패션 등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어요. 현재 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미래의 유물’ 컨셉은 2010년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을 방문했을 때 유물 발굴 현장에서 영감을 받아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래된 예술의 재해석]
전시의 첫 파트에서는 아샴의 2019년 작품 <푸른색 방해석에 침식된 아를의 비너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아를의 비너스>가 원작인데요. 17세기 프랑스 남부 아를 지역 로마 고대극장의 폐허 속에서 발견됐다고 해요. 발견 당시 조각에는 오른팔이 없었고, 왼팔도 일부만 남아있어서 최초에 이 조각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네요.
아샴은 그 조각상을 재해석해 일부러 부분적으로 파손시켜 침식된 것처럼 보이게 했고, 푸른색 석고와 반투명한 푸른 방해석으로 재료를 변형해 더 신비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조각상 뒤의 회화 작품은 2023년 작품 <숭고한 계곡, 스투바이탈>인데요, 폭이 5미터나 됩니다. 거대한 알프스 스투바이탈 계곡 아래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렸습니다. 아샴은 17세기 이탈리아 카프리치오 양식과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 스타일로 작업했는데요. 그림을 자세히 보면 스타워즈의 알투디투와 쓰리피오, 그리스 장군 페리클레스의 거대한 두상, 포르쉐 911 터보와 각종 건축물이 쌓여 폐허처럼 연출되어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언뜻 보면 고전적인 예술 작품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시간, 역사, 문화, 장소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 굉장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
포켓몬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파트에서 아샴이 시간과 역사를 섞어놓았다면, 두 번째 파트에서는 예술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아샴은 2020년, 포켓몬 원작 애니메이션 감독 유야마 구니히코와 협업하여 포켓몬과 아샴 자신의 세계관을 연결하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꾸준히 포켓몬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포켓몬 동굴>에서는 동시대 가장 유명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포켓몬이, 거대한 동굴 안에서 부식된 모습으로 놓여있습니다.
동굴 주변으로는 애니메이션을 위한 스케치와 거대한 포켓몬 카드들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동굴 주변으로는 애니메이션을 위한 스케치와 거대한 포켓몬 카드들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손바닥 만한 포켓몬 카드가 거대한 캔버스 크기가 되었고, 앞서 소개해 드린 작품들처럼 부서진 디테일이 있어요. 소재 자체는 익숙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단순한 변주만으로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시대적인 상징, 보편적인 오브제]
세 번째 파트에서는 고전적인 조각상과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얼굴을 절반씩 결합하여 한 화면에 배치한 <분절된 아이돌> 시리즈가 있습니다. 과거의 고전적인 조각상은 인체의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추구했죠. 보통 애니메이션 캐릭터들도 비현실적인 외모와 화려하고 개성 있는 설정을 두고 있고요. 서로 시대는 다르지만 이상화된 모습으로 대중들을 매료시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대와 현대의 우상을 조합한 셈입니다.
고전 조각상,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같이 시대적인 상징이나 보편적인 소재는 아샴이 정말 자주 사용하는 작품 요소입니다. 아샴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여러 문화적 아이콘을 해체하고 조합하면서 시각 이미지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발굴 현장 체험]
네 번째 파트는 유물 발굴 현장을 재현한 2024년 작품 <발굴 현장>입니다. 거대한 <굴착 벽>을 지나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 후, 폐허가 된 서울의 발굴 현장이 나타납니다.
이 현장에는 핸드폰, 신발, 카메라와 같은 현대적인 물건들이 유물이 되어 발굴된 것처럼 구현돼서, 마치 유적지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샴은 일상에서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오브제들을 미래 시점에서 제시하며 시간에 대한 인식을 무너뜨리는데요. 이 발굴 현장은 어쨌든 모든 것은 변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하게 만듭니다.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무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마지막 파트는 <아카이브 스튜디오: 콜라보레이션>이었는데요. 다니엘 아샴의 스튜디오를 옮겨온 공간이었어요. 아샴은 1990년대 힙합, 음악, 스니커즈 문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순수 예술 밖 여러 문화와 자연스럽게 교류해 왔습니다. 루이비통, 디올, 티파니, 포르쉐, 뱅앤올룹슨, 리모와, 벤츠, 젠틀몬스터, 나이키, 아디다스 등 셀 수 없이 많은 브랜드와 협업해 왔고요. 아래 작업들은 뮤지션 더 위켄드의 앨범 작업, 디올, 티파니와 협업한 주얼리 시리즈입니다.
특히 아샴은 크리스찬 디올과의 협업으로 패션쇼 무대를 함께 작업하기도 하고,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킴 존스와 협업해 직접 남성복을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와 브랜드의 협업, 아트 콜라보레이션은 제품의 가치도 올리고, 브랜드의 이미지도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죠. 예술가 역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채널을 뚫는 셈이기도 하고요.
1960년대를 장악했던 팝아트의 시대 이후, 순수예술과 상업적 디자인의 경계가 본격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술가와 상업 브랜드가 콜라보하는 경우를 셀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죠. 아샴은 시각 예술을 넘어 무대 디자인, 가구, 브랜드 협업 등 여러 장르와 분야로 교차하며 폭넓은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다니엘 아샴의 세계관과 다양하게 변주되는 현대 미술의 양상이 참 흥미로운데요. 이번 전시에 240여 점이 넘는 작품이 있어 글에서 소개하지 않은 내용도 많습니다. 워낙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작품이 많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은 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