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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걸고, 맥주 스타일을 뛰어넘다. JH 브루잉.

1901년에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광고 만화를 그리던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나이 22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했습니다. 회사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회사 자체가 자신의 철학과 창의성을 반영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넣음으로써, 자신이 곧 브랜드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이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마블 스튜디오, 픽사 스튜디오, 루카스 필름 등을 통해 펼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맥주 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국적 맥주 기업인 AB InBev사의 철자 중 ‘AB’는 앤하이저(Anheuser)와 부쉬(Busch)라는 창업주의 이니셜에서 따온 것입니다. 앤하이저-부쉬는 이제 다국적 맥주 기업의 일부가 되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브랜드 버드와이저의 소유주입니다. 앤하이저가 1850년대에 처음 맥주 양조장을 설립했을 때는 동네의 그저 그런 작은 양조장에 불과했지만, 앤하이저의 사위인 독일 이민자 출신 부쉬의 야심은 장인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동네의 작은 양조장을 전국구의 양조장으로 만들었으며, 그가 만든 맥주는 장차 미국을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인과 사위의 이니셜을 새겨 넣은 양조장의 이름을 영원히 남겼습니다.

전국의 양조장을 취재하면서 심심찮게 들려온 양조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브루어리 을를의 웨스트 코스트 IPA ‘이천만큼 사랑해’는 JH 브루잉(이하 JH)과 협업하여 만든 맥주입니다. 저는 이때 JH의 존재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의성의 호피홀리데이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맥주 ‘안계평야’ 또한 JH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기사를 통해 접한 국내 최초의 수도원 양조장 홉플로우는 JH와 협업하여 루멘 벨지안 화이트를 만들었습니다. J와 H, 뜻 모를 이니셜을 가진 이 양조장은 이름에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이렇게 맛있는 맥주를 연달아 만드는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취재를 위해 JH에 연락해 임종협 대표에게 회신이 왔을 때 한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JH는 양조장 대표의 이니셜이라는 것을. 전국 140여 개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 중에 유일하게 대표의 이니셜을 새긴 양조장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도 하남으로 떠났습니다.

하남, 서울의 동쪽 끝에 붙어 있고 도시의 북쪽에 강이 흐르고 있어 하남(河南)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입니다. 1990년대 미사리로 불리며 라이브 카페 문화의 대명사였던 곳도 하남에 있습니다. 인구는 30만이 조금 넘습니다. JH는 하남시 중에서도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취재 약속을 잡고 대중교통으로 이동 경로를 찾아보니 의외로 서울에서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로 가면 5호선 강일역에서 가깝습니다. 저는 대전에서 수서로 기차로 이동했으며, 수서에서는 양조장까지 시내버스로 40분 정도 걸렸습니다. JH가 이곳에 브루어리를 세운 이유도 바로 교통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 전국 유통을 염두에 둔다면 교통이 편리하고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도시가 적합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도시 속에 둥지를 튼 JH브루잉

JH는 복잡한 도시 속, 작은 사무실이 빽빽이 자리 잡은 커다란 빌딩 속에 나 혼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무 공간이 밀도 있고, 두부가 연상될 만큼 네모반듯한 빌딩에 자리 잡은 것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조장 탭룸에 앉아보니 꽤 안도감이 느껴졌습니다. 양조시설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탭룸은 겨우 8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입니다. 도심이라는 정글 속에서 일과 가정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사피엔스들이 잠시 휴식을 위해 찾은 동굴이 바로 이곳입니다. 크게 마음먹지 않아도 맥주 한 잔이 생각나면 즉시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아지트가 있다면 바로 이곳입니다.

아직 사피엔스들이 정글 속에서 사냥에 한창일 때 JH의 탭룸에서 임종협 대표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는 선한 웃음으로 맞아 주었으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처럼 편하게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편안함 뒤에 숨어 있는 JH의 맥주 인생은 험난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따 양조장을 만든 이유도 아주 작은 양조장을 별도의 직원 없이 혼자 운영하고 맥주까지 양조하는 1인 양조장 즉, 오너브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혼자 자리 잡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있습니다.


JH브루잉의 소박한 탭룸

임종협 대표는 브루어리 창업 전에 해외에서 회사 생활을 하다가 코로나 직전에 귀국하여 가장 어려운 시절에 양조장을 차렸습니다. 그는 맥주와 전혀 관련이 없는 마케팅 광고 회사에서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고 발굴해 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남을 위해 사업을 발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사업을 발굴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말레이시아 등의 해외에서 일을 했는데, 그러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은 것은 독일 뮌헨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을 때입니다. 맥주를 마시러 간 것은 아니었는데 독일에서의 삶에 맥주가 빠질 수 없었기 때문에 맥주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맥주 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돈도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그 대신 시간이 나는 대로 양조장을 찾아다니고 독일 소도시 여행을 다녔습니다. 독일의 맥주와 맥주 문화를 직접 맛보면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바로 맥주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홈브루잉입니다.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브루잉 실력을 꾸준히 연마했고, 퇴사하여 귀국 후 상업 양조에 뛰어들 결심을 합니다. 당시는 코로나가 한창 일 때로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만한 시절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코로나를 이겨내고 가동된 JH의 양조 설비들

JH가 맥주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계약 양조입니다. 계약 양조(Contract Brewing)는 자신의 양조 시설을 갖추지 않은 맥주 제조업자가 다른 양조장의 설비를 이용해 맥주를 생산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즉, 맥주 브랜드를 가진 회사(의뢰자)가 직접 맥주를 양조하지 않고, 다른 양조장에 맥주 제조를 위탁(위탁 양조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설비 투자에 큰 비용이 드는 맥주 제조자가 양조 설비를 직접 구매하거나 운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초기 투자 비용이 크게 줄어듭니다. 또한 새로운 맥주 브랜드를 런칭하거나 소규모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도 용이합니다. 위탁 양조장은 이미 전문성을 갖춘 곳이므로 고품질의 맥주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위탁 양조장의 입장에서도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되며, 서로 협력할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크래프트 맥주 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상승효과입니다. 계약 양조는 서로 간의 협력을 기본으로 하므로 역할 분담이 중요합니다. 가령 의뢰자가 레시피를 개발하고, 위탁 양조장이 맥주의 생산과 품질 관리, 납품 일정을 정하기도 하고, 의뢰자가 맥주 제조 레시피와 생산, 관리 일체를 위탁양조장에 맡기기도 합니다.

JH는 계약 양조 중 위탁 양조장의 역할로 수많은 맥주를 제조했습니다. 호피홀리데이와 함께 만든 맥주 ‘안계평야’는 호피홀리데이에서 굉장히 디테일하게 설계하여 의뢰한 경우입니다. 호피홀리데이는 안계평야의 쌀(안계미)의 특성이 돋보이고 호피(hoppy)한 맥주를 원했고, 마시기 편한 테이블 맥주를 의뢰했습니다. JH는 의뢰자와 구체적으로 맛과 향과 맥주 스타일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하면서 레시피를 잡았습니다. 대기업에서 쌀을 넣어 만든 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라이스 에일을 추구하는 이 맥주는 많은 개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일이면서도 기존의 라거를 꾸준히 마셨던 소비층들도 편안하게 마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로 연령층이 높은 농촌의 지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안계평야는 외부 유통을 하지 않습니다. 의성군 안계면의 맥주 공방에서만 마실 수 있습니다.


호피홀리데이이와 JH의 계약으로 탄생한 맥주 ‘안계평야’ / 출처: 인스타그램 @jhbrewing

JH가 참여한 또 다른 형태의 계약 양조로 홉플로우와 함께 한 벨기에 스타일 맥주를 꼽을 수 있습니다. 홉플로우는 전남 나주의 글라렛선교수도회에서 설립한 국내 최초의 수도원 맥주 공방입니다. 홉플로우는 4종의 벨지안 스타일의 수도원 맥주를 계약 양조로 만들었는데, 이 중 2종을 JH와 함께했습니다. 이 계약 양조는 안계평야와는 조금 다른 경우입니다. 안계평야는 독특한 재료와 세상에 없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의뢰자의 방향성을 잘 이해하고 수시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벨지안 화이트는 널리 알려진 스타일입니다. 변형을 주고 개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전통에 따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JH에서 먼저 충실하게 레시피를 잡고 그것을 다시 의뢰자와 논의하면서 나아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루멘 벨지안 화이트입니다.

JH의 고유한 맥주의 특징은 한마디로 ‘beyond beer style’입니다. 어느 맥주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게 만들었고, 맥주 스타일을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맥주 스타일을 뛰어넘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맥주 스타일의 요소를 결합한 맥주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독특하고 혁신적인 풍미를 만들어냅니다. 기존의 맥주 카테고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스타일은 꽤 많습니다. 예를 들어, 호피 밀맥주는 밀맥주의 과일 향과 가벼운 바디감에 IPA나 페일 에일의 강렬한 홉 캐릭터를 더한 스타일입니다. 사워 IPA는 사워 맥주의 새콤한 맛과 IPA의 과일 향이 강한 홉 캐릭터를 혼합한 스타일로, 드라이 호핑(dry-hopping)으로 향을 더하기도 합니다. 벨지안 스타우트는 스타우트의 진한 로스티 몰트 풍미와 벨기에 에일 특유의 과일 및 스파이시한 효모 특성을 결합한 스타일입니다. 배럴 숙성 에일도 일종의 비욘드 맥주 스타일입니다. 버번이나 와인 배럴에 숙성하여 독특한 풍미를 더했습니다. 이렇게 맥주 스타일을 혼합하거나 뛰어넘는 것은 크래프트 맥주의 가장 실험적인 형태일 것입니다. 가끔 맥주 전통주의자에게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비욘드 맥주 스타일, JH의 맥주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씨-홉 잉글리쉬 페일 에일(C-HOP ENGLISH PALE ALE)은 알코올 도수 5.2%의 영국 페일 에일입니다. 영국 페일 에일은 원래 영국의 홉과 몰트를 균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퍼글(Fuggle)이나 이스트 켄트 골딩(East Kent Golding)과 같은 전통적인 영국 홉의 꽃 향, 허브 향, 약간의 흙 내음과 영국 몰트에서 나오는 캐러멜, 토피, 비스킷과 같은 달콤하고 고소한 풍미, 그리고 효모에서 나오는 은은한 과일 향과 약간의 에스테르가 특징입니다. 씨-홉 잉글리쉬 페일 에일은 영국 홉 대신 미국의 C-홉을 사용했습니다. C-홉은 미국을 대표하는 홉으로, 씨-홉 잉글리쉬 페일 에일에는 콜롬버스(Columbus), 치눅(Chinook), 캐스케이드(Cascade)를 사용했습니다. 나머지 재료인 몰트와 효모는 영국식입니다. 씨-홉 잉글리쉬 페일 에일은 쌉쌀하고 묵직하면서 은은한 과일 향이 납니다.


JH의 Beyond Beer Style, 씨-홉 잉글리쉬 페일 에일

맥주 스타일을 뛰어넘은 맥주로 엑스트라 사브로 스타우트(Extra Sabro Stout)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엑스트라 사브로 스타우트는 사브로 흡으로 드라이 호핑한 알코올 도수 6.2%의 스타우트입니다. 보통 스타우트라고 하면 다양한 맥아의 조합으로 맛을 낸 몰티한 풍미가 특징입니다. 여기에 호피한 풍미를 추가했습니다. 코코넛 스타우트에서 영감을 받아 양조했다고 합니다. 사브로 홉은 홉 중에서 코코넛 향이 특징입니다. 코코넛 스타우트를 만들 때 사브로 홉을 사용하면 맥주의 원재료만 가지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시도했다고 합니다.


JH의 Beyond Beer Style, 엑스트라 사브로 스타우트

양조장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일까요? 앞으로 명예롭게 맥주를 양조하겠다는 의지일까요? 임종협 대표에게 여쭸더니 그렇게 큰 의미는 아니라고 합니다. 혼자서 회사도 경영하고 맥주도 제조해야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비욘드 맥주 스타일의 도발적인 맥주를 보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맥주 그 이상의 맥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염태진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맥주에세이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카카오, 브런치 아이디: @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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