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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마시면 여기가 미국인 거다 – 헤이스탁 판교 브루어리

포틀랜드는 미국의 대표적인 홉 산지인 오래건, 워싱턴 그리고 아이다호 주에서 멀지 않아 새로 나오는 다양한 흡을 이용한 맥주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포틀랜드는 미 서북부에서 시애틀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목재를 수송하는 항구로 시작해 경제와 상공업 그리고 교통이 발전한 도시입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으로 꼽히는 이곳에 홉 생산지까지 가까이 있으니, 독창적인 실험 정신과 현지 재료를 강조하는 크래프트 맥주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포틀랜드는 1980년대부터 크래프트 맥주 산업이 성장하면서 지역 홉을 활용한 독특한 맥주 스타일을 개발해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맥주 양조장을 여행할 수 있는 이곳이 바로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수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라피티가 있는 포틀랜드의 거리

한국에 포틀랜드처럼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도시인 판교가 있습니다. 판교는 IT 및 첨단 산업이 몰려 있고 쾌적한 주거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습니다. 포틀랜드와 조금 떨어져 있지만 같은 서부에 있는 실리콘밸리처럼, 판교에 테크노밸리가 있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판교에는 미국 서부의 맥주처럼 제대로 마실만한 크래프트 맥주가 없는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그것은 대동강 페일 에일로 유명한 더부스(THE BOOTH)가 판교 브루어리를 떠나 미국으로 이전하면서 남겨진 빈자리 때문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더부스가 떠난 자리를 인수하여 판교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브루어리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판교에 위치한 헤이스탁 브루어리의 전경

브루어리의 주인공은 헤이스탁(Haystack) 판교 브루어리입니다. 헤이스탁의 대표이자 브루어인 이진수 대표는 앞서 언급한 포틀랜드, 크래프트 맥주, 더부스와 모두 관련이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통신을 전공하고 포틀랜드로 떠나 그곳에서 대학원과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경험할 수 있었던 문화는 포틀랜드의 킨포크였습니다. 킨포크(Kinfolk)는 원래 ‘가까운 친족’이라는 뜻으로 포틀랜드에서 시작한 독립 잡지를 말합니다. 킨포크는 가족이랑 식사하듯 서로 이야기하면서 즐기는 커뮤니티와 슬로우 라이프를 내세우며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습니다. 이진수 대표는 포틀랜드에서 다양한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고 로컬 브루어리를 체험하면서 미식과 건강한 식생활 그리고 로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귀국한 것은 2013년도입니다. 이때는 한국에서도 이태원을 중심으로 크래프트 맥주 문화가 움트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는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러 다니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아내의 권유로 홈브루잉을 시작하게 됩니다. 맥주 공방 비어랩에서 매주 맥주를 만드는 것이 그들이 했던 주된 데이트 코스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더부스의 브루어와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더부스에서 3년간 양조사로 일했습니다. 이렇게 홈브루잉과 상업 양조를 모두 경험했지만, 그때까지 양조장을 직접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회는 우연히 찾아옵니다. 더부스가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그에게 양조장과 양조 시설 일체를 인수하라고 제안하면서 말입니다. 이때 양조장 사업을 망설이던 그를 든든하게 밀어준 것은 그의 아내입니다.

그렇게 판교의 브루어리는 2019년도에 설립되었습니다. 양조장 이름을 지을 때 미 서부의 캐넌 비치에 있는 헤이스탁이 떠올랐습니다. 헤이스탁(Haystack)은 포틀랜드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달리면 나오는 오리건주 해안에 있는 커다란 바위입니다. 헤이스탁 락(haystack rock)이라고 불리는데 마치 건초더미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밀레나 고흐가 그린 건초더미 같기도 하고, 제주도 산방산의 미니어처 같기도 합니다. 이진수 대표는 이 바위의 든든한 존재감과 신비함에 끌려 타지 생활에서 마음이 헛헛할 때 자주 찾아가곤 했습니다.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서 위로해 주던 바위처럼 헤이스탁 브루어리가 판교에서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미국 오리건 주 캐넌 비치에 있는 헤이스탁 락

헤이스탁 브루어리의 주된 소비층은 판교의 회사에 다니거나 판교에 거주하고 있는 지역 주민입니다. 판교는 유동 인구가 적은 곳이어서 헤이스탁을 찾는 손님의 대부분이 단골입니다. 판교에서 IT 업계나 첨단 산업에서 일하는 분, 디자이너와 같이 창의적으로 일하는 분, 소규모로 가게를 운영하는 분 등 맥주의 가치를 알고 미식을 좋아하는 분들이 주로 찾습니다. 유학이나 여행을 통해 세계의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쉽게 접하다 보니, 이러한 문화를 흥미 있게 바라보고 직접 즐겨 보고자 하는 욕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진수 대표는 이러한 문화적인 호기심을 실리콘밸리의 커피 문화와 비교해서 말합니다. 블루보틀과 같은 스페셜티 커피는 실리콘밸리에서 기존의 전통을 깨고 오로지 품질로만 어필했습니다. 그것은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매력을 끌 만한 것이었습니다. 창의성은 다양한 정보가 섞이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그 과정에 맥주가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맛있는 맥주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진수 대표는 말합니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품질을 끌어낸다’는 것은 크래프트 맥주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철학입니다.


바와 테이블이 있는 헤이스탁의 내부 탭룸의 모습

헤이스탁은 맥주 스타일의 특징이 분명하면서 균형감 있는 맥주를 추구합니다. 한마디로 맥주의 단맛, 쓴맛, 풍미, 질감, 산미, 알코올의 존재감, 탄산감, 마무리 등이 균형감 있게 어우러진 맥주입니다. 그리고 미국식 맥주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신선한 홉 향이 담긴 맥주를 말합니다. 갓 수확한 홉의 향은 그 어떤 향수보다도 매력적입니다. 파크리트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보면 매혹적인 향을 추출하는 데 몰두한 미치광이가 나옵니다. 헤이스탁도 홉에서 나오는 향을 고스란히 맥주에 담기 위해 미쳐 있습니다. 한국의 농장에서 직접 홉을 공수하기도 어렵고, 미국의 좋은 홉은 자국 내에서만 소비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하지만 품질 좋은 홉을 공수할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다.


헤이스탁의 대표 맥주 콜쉬 스타일 에일

헤이스탁은 맥주 문화에도 정성을 다합니다. 헤이스탁은 크래프트 맥주가 맛있는 맥주에만 머무르기를 거부합니다. 활기차고 포용적인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개인화된 파편적인 삶과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 맥주가 개인을 이어주고 기쁨을 주는 역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헤이스탁은 바비큐 파티를 열고, 미술관을 돌고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아트 앤 에일’ 행사도 개최했습니다. 그 밖의 블루스 모임, 원데이 클래스, 시음회(흑백양조사) 등의 행사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행사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헤이스탁은 연중 판매하는 맥주가 없습니다. 계절마다 다른 맥주를 생산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맥주 스타일이 있습니다. 미국식 페일 에일, IPA, 포터 등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일곱 가지의 맥주가 있었습니다. 그 스타일을 열거하면, 앰버 에일, 콜쉬 스타일 에일, 헤페바이젠, 웨스트 코스트 IPA, 헤이지 IPA, 포터, 과일이 들어간 에일입니다. 이중 콜쉬 스타일 에일과 헤페바이젠은 원래 독일 맥주이지만, 헤이스탁은 미국 크래프트 맥주로 재해석한 스타일로 만들었습니다. 콜쉬 스타일 에일은 야관문을 넣어 마른풀 향이 독특하고 미국식 홉 향이 은은한 맥주로 서울의 맥주 판매점 유미마트와 메즈나인 브루어리와 협업하여 만들었습니다. 헤페바이젠은 오렌지와 감귤, 시트러스 향이 감도는 미국식 위트 에일입니다. IPA는 쌉쌀한 홉과 은은한 과일 향이 감도는 미국 서부 IPA와 오렌지, 망고,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 과일의 풍미가 돋보이는 미국 동부의 헤이지 IPA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계절마다 IPA 스타일이 조금씩 바뀔 수 있고, 사용하는 홉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헤이스탁의 로버스트 포터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마신 맥주는 로버스트 포터입니다. 질감이 묵직하고, 다크 초콜릿과 커피 향이 조화롭습니다. 이 맥주를 마시면서 이진수 대표와 나눈 대화가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맥주와 커피와의 공통점에 관한 대화였습니다. 맥주와 커피 모두 밀링과 로스팅 과정을 거쳐 만드는 음료입니다. 맥주에서 밀링(Milling)은 맥아의 탄수화물이 당으로 잘 분해될 수 있도록 곡물을 갈아주는 과정입니다. 곱게 갈수록 수율은 올라가지만, 너무 고우면 맥주의 다음 양조 과정이 힘들어집니다. 적당한 크기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원리는 커피에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커피도 수율과 산미와의 반비례 성질 때문에 적당한 크기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맥아도 로스팅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지기 때문에 커피와 비슷한 향을 냅니다. 특히 포터에 사용되는 맥아는 더욱 까맣게 구운 것을 사용합니다. 맥아도 커피도 까맣게 구울수록 더욱 ‘오소독스(orthodox)’한 맛을 냅니다. 맥주를 양조하는 것을 영어로 brewing이라고 하고, 커피를 추출하는 과정도 brewing이라고 하는 점도 비슷합니다. 이밖에 꽤 깊숙이 맥주와 커피의 공통점에 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서 로버스트 포터를 마시니 꽤 다른 인상을 받았습니다.


헤이스탁의 지하 벙커로 내려가는 길의 그라피티

헤이스탁은 양조장에 작은 테이블과 바(bar)가 딸린 탭룸입니다. 음식은 간단한 스낵 정도만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맥주에 페어링해 보고 싶은 독특한 음식이 있다면 직접 준비해 보거나 주변의 배달 음식을 시켜도 무방합니다. 헤이스탁의 바에서 맥주 탱크를 바라보며 혼자 맥주를 즐길 수도 있고, 작은 테이블에서는 삼삼오오 맥주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그라피티가 그려진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 벙커에 10명 이상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헤이스탁은 지역의 맥주 문화에도 적극적입니다. 브루잉 강의나 브루어리 투어는 일상이고, 봄에 할 바비큐 파티를 벌써 구상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작가와의 대화>에 사용할 맥주로 헤이스탁과 콜라보하기로 기분 좋게 합의하였습니다. 판교의 작은 브루어리가 여러분의 일상에 작은 활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염태진
염태진
맥주인문학서 맥주에세이 저자 맥주로 내장도 채우고 뇌도 채우며 날마다 좋은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카카오, 브런치 아이디: @i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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